한국 온 지 정확히 2주가 됐다.
일년을 못만난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고 미뤄뒀던 병원도 다니느라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아직도 만나야 할 사람들이 한 무리다.
이 곳은 내가 일년 전 떠났던 그 때와 같은 계절이고 장소와 사람들 모두 그대로였다. 그래서 좋았다. 내가 애써 적응을 해야할 것들이 많지않았다. 겨울에 떠나 다시 겨울에 돌아왔으니 누구에게는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혼자였던 나에게는 길고 긴 시간이었다. 내가 기억한 추위만큼 이곳은 여전히 얼굴이 깨질듯이 추웠고 알게 모르게 새로 올라간 건물들도 보였다. 그래도 대부분은 내가 기억하고 떠났던 그 모습이 여전했다.
뉴질랜드로 떠나야겠다고 미리 계획한건 아니었다. 말하자면 살면서 느낀 나의 생각과 우연한 말 한마디가 클리나멘으로 만나 인생의 방향이 다른 곳으로 틀어졌다고 하면 맞을 것이다. 우리 나라 교육 과정이 싫었고, 하필 나는 아이 교육을 위해 전국에서 모여드는 동네에 살고 있었다. 애들이 유치원이었을때 교육열 강한 어느 엄마와 교육관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 그분에게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 라는 말을 들었다. 그 분과 나는 지금 매우 친한 사이가 됐지만 여전히 교육관은 다르다. 애들이 초등학교 입학 전, 이 동네에서 애들을 키우면 나도 똑같은 엄마가 될것을 알기에 양평으로 이사를 가려고 했다. 양평에 집을 보러 수 차례 다녀왔다. 산과 들이 있고 강이 흐르는 곳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결국 이사는 가지 못했다. 남편의 출퇴근이 너무 길었다.
내 아이들은 초등학교때부터 학원에서 밤 10시 넘어 집에 돌아왔고, 아무런 취미도, 흥미도 없이 그저 시험을 위한 공부를 했고 시험이 끝나면 친구들과 게임을 하거나 코인 노래방을 가거나 놀이 동산에 가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것이 인생의 전부인 회색 빛의 아이들이 안쓰러웠다.
어른이 되어 하고 싶은 일이나 좋아하는 취미 같은 것도 없었다. 그들은 어릴때부터 학원 다니는 것과 숙제하는것, 점수로 자신을 평가받는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딱히 알고 싶어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내가 본 아이들은 타의로 세상을 살아가는, 어디론가 끌려가는 소 같은 모습이었다.
그냥 우연이었다. 시누와 통화하다가 뉴질랜드 얘기가 나왔다. 아이들을 그곳에서 키우고 싶다는 말을 하며
나에게도 권유를 했다. 그 진지하지 않은 가벼운 대화가 시작이었고 나는 뉴질랜드로 떠났다. 다른 나라는 깊이 알아보지도 않았다. 남편은 갑자기 외로운 기러기 한마리 신세가 됐다. 우리 가족 모두에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결혼하고 한번도 가족이 떨어져 살아본 적도 없고 평소 기러기 가족을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도 않은 나였다. 공항에서 헤어질때 우리 넷은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을 펑펑 울었다. 비행 내내 마음이 아파서 뉴질랜드의 끝없이 높은 하늘을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졸지에 이산가족이 되었지만 우리는 각자의 방법으로 살아갔다. 아이들은 조금씩 색을 찾고 있다. 큰 애는 양궁부에서 그 해 최고 점수 기록을 낸 학생이 되었고 수학상을 받았다. 작은 아이는 로잉을 배웠다가 유학생이라 대회가 많은 여름(한국은 겨울)에 한국을 와야하기 때문에 대회 참가가 불가능해 입회 권유를 받지 못했지만, 좁은 배를 타고 물과 가까이 노를 젓는 새로운 경험의 짜릿함을 나에게 이야기하느라 한동안 입이 마를새가 없었다. 과목을 본인이 스스로 선택하고 공부하기 때문에 처음으로 진지하게 각자의 인생 방향을 고민했다.이미 결정되어있는 과목이 아니고 본인이 배울 과목을 직접 선택함으로써 아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고 책임감을 갖는다. 그래서 대학처럼 교실을 찾아가며 수업을 듣는다. 학생이 한 교실에 하루 종일 앉아있고 선생님이 교실을 찾아오는게 아니고, 학생이 선생님을 찾아간다. 수업을 같이 듣는 친구는 과목마다 다르다. 나는 이 방향이 조금 더 아이들에게 본인의 색을 찾게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직 1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한국에서보다 조금 더 생기를 찾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두런 두런 이야기 나누며 남편과 나는 서로를 위로했다.
남편은 외로웠을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지낸 나도 외로웠다. 남편이 뉴질랜드에도 왔었고, 인터넷의 발달로 매일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눴지만 좁혀질 수 없는 현실적인 거리만큼 그리움은 컸다. 알고보니 같은 공간에서 같이 잠을 자고, 같이 밥을 먹는 그 아무것도 아닌것 같은 일들이 행복인 것이다. 손잡고 길을 걸을때나 소파에 앉아서 서로의 다리 하나씩을 상대 어딘가에 살짝 올려놓고 영화를 볼 때도, 밤에 잠들기 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두런 두런 나누다가 잠이 들때도, 자다가 깨어 상대가 이불을 안 덮고 있는걸 발견하고 이불을 덮어주는, 이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참 그리웠다. 대단한 것이 슬프지 않았다. 작은 것들이 삶을 살게 한다는것을 떨어져 살며 많이 느꼈다. 며칠 전 지인과 만남이 길어져 늦은 밤 귀가 했을 때 역 앞까지 마중나온 남편을 본 순간 나의 마음은 행복이 꽉 들어찼다. 추우니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코 나왔다.
"여보, 엄청 춥지?"
이 한마디가 나를 행복하게 했다가, 이내 슬퍼졌다.
아이들의 적응을 위해 2년을내가 같이 나가는 것을 계획하고, 그 후는 홈스테이를 생각했다. 1년을 보낸 지금, 앞으로 그 계획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확실한건 내년에도 우리는 떨어진 가족으로 살아야한다.
팔짱을 꼈다. 여전히 얼굴이 깨질 것 같은 추위다. 우리는 총총 걸음을 걸으며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이 모두 모였다. 그 모습을 기억에 담으려 애썼다. 내년에 이 순간을 자주 꺼내 볼 것이다. 얼굴이 깨질것 같은 밤, 남편과 걸었던 그 짧은 시간이 내년을 살게하는 작지만 단단한 힘이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