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에 첫 커피는 고등학교 자판기에서 파는 프림 커피였다. 종이컵 끝에 입술을 대고 호로록 호로록 마신 그 커피는 뜨겁고 달짝지근한 맛이었다. 단 돈 백원정도였지만 가볍지 않은 묵직한 맛이었다. 학창시절에 열심히 공부를 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친구와 사먹은 그 커피는, 내 기억 중 제일 맛있는 커피인것 같다. 커피가 정말 맛있었는지, 그때 추억이 그리운건지는 잘 모르겠다.
대학때는 아무리 생각을 쥐어짜내도 커피를 마신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신 대학은 처음 술에 취해 세상과 함께 흔들거렸던 젊은 청춘이 있었다. 내 주량도 모르고 주는 대로 넙쭉 넙쭉 받아 먹고 몇번의 숙취로 인해 내 주량을 알게 된 나름의 값진 시간이다. 술을 배운 기억은 나는데 커피를 마신 기억이 전혀 나질 않는걸 보면 난 이때 커피를 즐겨 마시지 않았던것 같다. 아메리카노 같은 걸 팔았는지도 모르겠다.
본격적으로 커피를 마신건 회사를 다니면서였다. 그때도 아메리카노를 지금처럼 매일 마시지는 않은것 같고, 회사 탕비실에서 봉지 커피를 자주 타 마신 기억이 있다. 조용한 탕비실에서 동료와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신 커피맛이 아직도 생각난다. 그때는 열정도 많았고 회사일을 내 일처럼 열심히 했다. 젊었고 꿈이 있었고 회사에서 인정도 받았다. 나는 어딜가든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기획팀에 동갑내기 직원과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을 했다. 사내 결혼이다. 결혼 후 아이가 생겼는데, 유산 위험이 있어 회사를 그만뒀고, 그 뒤로 다시 직장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나의 꿈도 같이 사라졌다.
내가 선명하게 기억하는 커피는 여기부터다.
아이를 낳고 애를 키우며 동네 엄마들과의 인맥이 새로 생겼다. 이때 우리나라 커피숍도 본격적으로 늘어나는 때였다. 골목마다 커피숍이 생겼고 엄마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가기전 커피를 포장했다. 엄마들의 수다는 1차로 끝나지 않았고, 다음 커피숍으로 향했다. 뭐 그렇게 할말이 많았는지, 3차는 일행 중 한명의 집으로 가 드립커피를 한잔씩 두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대부분이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때 엄마들은 대부분 휴직 상태였거나, 직장을 그만뒀거나, 나처럼 아이를 낳고 어쩌다보니 주부가 된 사람들이었다. 사회에 속한 울타리가 없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울타리를 다시 만들었다. 어딘가 속해있는 느낌이 주는 안정감이 좋았다. 아이를 혼자 키우는데 지친 사람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육아 정보를 나눴고 아이들이 커가면서 교육 이야기로 바꼈다. 누구는 다시 직장으로 돌아갔고 누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나는 내 일을 하고싶었다.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닌것 같다.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일궈내 느끼는 성취감이 좋아했다.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어린 아이들을 키우며 하는 공부는 잠을 줄여야만 가능했고, 매일 5시간정도를 자며 열심히 했다. 이때 나는 허리와 어깨가 고장났고 지금까지 고생이다. 그렇게 새로운 직업이 생겼고 아이를 키우며 집에서 일할 수 있는 프리랜서로 일을 했다. 이 때 나는 새로운 커피 머신을 샀다. 백화점 이곳 저곳을 다니며 마셔보고 비교해서 제일 내 입맛에 맞는 커피 회사의 것을 선택했다. 캡슐을 넣으면 에스프레소를 내려준다. 나는 태생적으로 체력이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에 커피가 없는 삶은 상상을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커피를 한 잔 마신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요란스럽게 에스프레소가 만들어진다. 구수한 커피 콩 냄새에 기분이 한껏 올라간다. 작은 컵에 담긴 에스프레소가 참 예쁘다. 따뜻한 물을 부어 아메리카노를 손에 들고 작은 방 작업실로 향한다. 점심을 먹고 또 한잔 내린다. 이야기를 나눌 동료는 없지만 커피를 마시는 그때가 내 휴식 시간인건 마찬가지다.
현재도 커피는 여전히 나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다. 캡슐 커피 머신은 진작에 남을 줘버렸고 그 뒤는 모카 포트, 핸드 드립, 또 다시 캡슐 커피, 가루 커피 등을 거쳤다. 지금도 질릴때 쯤 다른 방식으로 커피를 만들어 마신다.
뉴질랜드로 이주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커피 머신을 집에 들이는거였다. 커피를 안마시면 두통이 온다. 카페인 중독이다. 매일 한 두잔씩 수십여년을 마셔왔더니 몸에서 커피를 찾는다. 뉴질랜드 호주 커피인 롱블랙이 참 맛있어서 종종 카페로 마시러 간다.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혼자 가기 때문에 커피 한잔 앞에 두고 즐거운 상상을 즐긴다. 풍경도 좋고 날씨도 좋다. 진한 커피맛을 좋아하는 나에게 롱블랙은 어떤 선택지보다도 훌륭하다. 우리나라의 머그잔이 아닌 작고 귀여운 커피잔에 나온다. 커피잔 받침도 당연히 함께다. 직원이 커피를 테이블까지 가져다준다. 커피숍 풍경도 한국과 많이 다르다. 커피맛이 훌륭하다. 가만히 고요한 마음속을 들여다본다.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를 많이 생각한다. 혼자 있는 남편도 생각하고 이제 곧 부모인 우리를 떠날 아이들도 생각한다. 그러다보면 커피잔은 금새 비어있다. 뉴질랜드에서 마신 커피는 항상 가족을 생각하게 했다. 나는 뉴질랜드를 떠날때 커피가 제일 아쉬울것 같다.
나는 여전히 커피 예찬가다. 오래간만에 한국에 돌아와서 만날 사람도 많고 외출할 일도 많다보니 집에서보다 밖에서 마시는 커피가 더 많다. 하지만 요즘은 예전처럼 커피에 진심인것 같진 않다. 마시는 횟수는 비슷하지만 커피에서 느끼는 감동이나 여유가 많이 사라졌다. 습관처럼 마시는 느낌이다. 그 안에서 작은 즐거움을 찾지 않는다. 커피 머신에 관심을 쏟았을때도 있었고, 커피 원두를 공부했던적도 있었다. 내 입에 맞는 커피를 찾기위해 이것 저것 시도한적도 많다. 해보지 못한 한가지는 바리스타 공부인데, 언제 시간이 날때 공부해보면 좋겠다는 생각만 하고있다. 커피를 아마 현재 생각으로는 죽을때까지 마셔야할것 같으니 알고 먹으면 그 재미가 더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도전해보고 싶다.
아이들이 다 크고 조금 큰 쉼표가 나의 삶에 찍힐때, 작은 컵 받침있는 예쁜 커피잔 2개를 살 생각이다. 나만큼 커피를 즐기지는 않지만 남편과 맛있는 커피 한잔 내려 매일 아침을 시작하고 싶다. 이미 나의 삶 속에 녹아있으니, 어떻게 즐길 것인가를 고민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