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집 살림

뉴질랜드에

by 게으른 곰

오전 9시, 문자가 왔다.


'네 집 키는 차고 안에 뒀어.'


부동산 관리인이다. 이럴 수가. 뉴질랜드 문화를 다 알려면 한참 멀었다. 만나지 않고 이렇게 열쇠를 건네다니. 비대면으로 열쇠를 건네받을 거라는 것은 상상도 안 했다. 0.1%도 아니, 0.00001%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오늘 아침에 일어나 열심히 혼자 스피킹을 했다. 이사 갈 집의 키를 받기로 한 날이다. 그동안 연락을 주고받은 나의 새 부동산 매니저와의 반가운 만남을 위해 내가 질문할 내용과 인사, 그리고 약간의 농담을 연습하고 있었다. 아직 영어가 입에서 맴맴 돌기 때문에 예상 질문, 답안, 농담을 미리 추렸다. 그리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먼저 반갑게 악수를 하고 통성명을 하겠지? 그리고 오늘 날씨가 좋다고 얘기하고 (좋은 날씨를 연습했는데 아침부터 비가 온다.) 이사 가기 참 좋은 날이라고 해야지. 그녀와 집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 집 사용에 대해 짧은 설명을 듣게 될 거야.(전혀 아니다) 그럼 나는 잔디 관리나 수도 요금에 대해 물어봐야지! 그리고 우린 다시 반가운 인사를 하고 헤어질 거야.'


가 나의 시나리오다.


그런데 저 문자가 전부다. 아침에 연습한 게 조금 억울했다. 아니, 그 연습이 언젠가 나에게 도움이 되는 날이 오겠지만 오늘은 아닌 것이다. 아쉬움 반, 안도 반의 마음으로 나는 그녀(그일지도 모르겠다.)가 열쇠를 두었다는 장소로 갔다. 1층은 차고인데 지은 지 오래된 집이라 왠지 음산했다. 차가 들어갈만한 공간을 제외하고 넓은 공간을 방치하고 있었다. 사용하지 않을 물건을 보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과연 이 축축하고 음산한 이곳을 사용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열쇠만 얼른 챙기고 집구경을 하러 갔다. 이미 집을 계약하기 전 둘러봤지만 이웃의 짐이 있는 상태와 없는 상태의 집은 또 다를 것이다. 이 집의 장점 중 하나는 수납장이 정말 많다는 점인데 그때는 실례가 될까 싶어 모두 열어보지 않았다. 키를 돌려 집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나의 이웃이었던 닉이 살던 집이다. 나에게 늘 친절했던 그는 그가 살던 집을 나에게 넘기고 이사를 갔다. 집주인에게 나를 소개해 주었기 때문에 집 구하기 어렵다는 뉴질랜드에서 수월하게 집을 구할 수 있었다. 닉은 이사 가는 전날까지 우리 집 잡초를 정리해 주고 떠났다. 이렇게 친절한 이웃을 만난 건 행운이다. 비록 내 영어가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린 깊은 대화는 못했지만 우리는 서로 좋은 이웃이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개 냄새가 났다. 닉은 개를 키웠다. 개의 나이가 꽤 들어 보였는데, 흰색 말티즈와 푸들이 섞이지 않았을까 싶은 외모를 가졌었다. 닉이 이사하는 날, 정신없는 닉을 위해 나는 개를 맡아줬다. 그 개의 이름은 밀리였다. 우리 집에서 주인을 찾으며 돌아다니던 밀리의 냄새가 난다. 냄새는 닉의 가족을 떠오르게 했다. 일단 집안의 모든 창문을 열었다. 밀리의 냄새를 지우고 우리 가족의 냄새로 채워야 한다. 이사 갈 집은 지금 살고 있는 집과 규모는 비슷하지만 집 구조가 알차고 뒷마당이 있기 때문에 지금 집에 비해 장점이 많다. 월세는 지금 살고 있는 집보다 조금 높은데 잔디 관리 비용이 추가된 가격이다. 집주인이 잔디 관리자를 고용하고 주기적으로 우리 집으로 보내줄 거라 내가 신경 쓸 일이 없다. 월세라 표현했지만 뉴질랜드는 주세다. 매주 일주일 세를 낸다. 처음엔 이게 적응이 안 됐는데 은행 계좌에 자동이체를 해놓으니 금방 적응됐다. 우리나라처럼 월세 개념이 익숙해 있어서 처음엔 한 달 치를 이체했는데, 나는 자연히 1일부터 30일이나 31일로 계산을 했다. 그래서 초반에 날짜 맞추는 게 어려웠다. 4주는 28일이다. 이게 간단해 보이지만 익숙해지는 데까지는 두 달 치 월세를 내고 난 뒤다. 두번째 달째도 한 달 치를 입금했는데, 계속 날짜 착오가 생기니 부동산 매니저가 계좌 자동 이체를 해놓으라고 조언해 줬다. 매주 통장에서 빠지는 주세가 처음엔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적응하는데 왜 2달이나 걸렸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IMG_3756.jpg 주방에서 바라본 뒷 마당

이사 갈 집은 1층이 차고, 2층이 주거공간이며 뒷마당은 주방 쪽에 연결된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뒷마당을 내려가는 계단 옆에 작은 테라스가 있고 닉이 나에게 아주 약간의 돈을 받고 넘긴 야외용 의자가 있다. 잠깐 의자에 앉았다.

이웃집들로 둘러싸인 나의 뒷마당은 울타리를 따라 큰 나무들로 둘려싸여있어 사생활 보호가 그럭저럭 가능하다. 긴 빨랫줄이 있어 아마 빨래를 널 때 제일 많이 마당으로 나가게 되겠지만 탁 트인 공간이 있다는 점이 무척 좋다. 비 오는 날은 비 오는 날대로, 해가 쨍쨍한 날은 해가 쨍쨍한 날대로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 사는 집은 도로 바로 앞이라 종일 블라인드를 걷을 수 없었다. 해가 떠도 비가 와도 집안은 늘 답답했다. 그것에 비하면 이곳은 천국이다. 한참을 의자에 앉아있다가 마당을 한 바퀴 돌았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왔기 때문에 잔디가 밟히는 감촉이 느껴졌다. 뉴질랜드에서 오래간만에 느끼는 즐거움이다. 지금 사는 집은 사진으로 구조만 보고 한국에서 계약을 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일 년을 살아보고 후회를 많이 했다. 그 집엔 잔디 마당도 아니고 작은 텃밭이 있었는데 딱히 뭘 심고 키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놀렸다. 텃밭을 방치하면 그냥 텃밭 그대로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나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였는지 텃밭은 스스로 잡초를 키웠다. 집의 창고와 차고, 잔디 마당이나 텃밭 모두 세입자가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나는 2-3주에 한 번, 사용하지도 않는 텃밭에 쭈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았다. 강한 햇빛과 비가 자주 오는 뉴질랜드의 날씨는 잡초를 키우기에 아주 적절했다. 대충 적절한 게 아니고 매우 적절했다. 내가 잠시 방심하면 잡초는 무서울 만큼 자랐고 숲을 만들었다. 아마 뉴질랜드에 와서 제일 열심히 한 일은 잡초 뽑은 일이 아닌가 싶다. 이 모든 나의 수고는 한국을 다녀온 후 수포로 돌아갔다.


12월과 1월은 뉴질랜드 여름방학이다. 우리는 이때 한국에 다녀왔다. 2달 동안 실컷 먹고 만나고 다시 뉴질랜드로 돌아오니 나의 텃밭은 아마존이 되어있었다.


IMG_3756 copy.jpg 맨 땅이었던 텃밭

맨 땅이었던 나의 텃밭의 놀라운 생명력에 경의를 느낀다. 나의 텃밭은 생명을 품고 있다. 그리고 뉴질랜드의 기후가 생명을 키웠다. 나의 친절한 이웃 닉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던 건지 이사 가기 하루 전 날 잡초를 보기에 괜찮을 정도로 정리해 줬다. 이미 숲이 된 나의 텃밭을 모두 정리하기엔 그도 무리였을 것이다. 무릎을 굽혀 잡초를 뽑을 수 있는 수준은 이미 넘어섰기 때문에 이사 가기 전에 전문가를 불러야 한다. 전문가의 도움 없이 혼자 어떻게 수습을 한다고 해도 잡초 쓰레기가 문제다. 차를 타고 어딘가에 버릴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나는 차가 없다. 그러니 일단 마음 놓고 쑥쑥 자라렴.


나는 오늘부터 두 집 살림을 시작했다. 당분간은 짐을 옮기고 전기와 인터넷, 가스를 연결하고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데 시간을 보낼 것이다. 다행히 옆집이라 거리가 멀진 않아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는 바로 닉에게 중고로 구입한 세탁기다. 오늘 세탁기를 자세히 보니 크기가 너무 작다. 게다가 세탁조 가운데 봉이 쑥 나와 있다. 처음 보는 물건이다. 저 봉 때문에 옷이 더 적게 들어갈 건 틀림없다.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족히 20년은 지난 할머니 세탁기 같다. 걱정이 앞서긴 하지만 잘 작동한다고 했으니 믿어야지. 닉은 내 친절한 이웃이었으니까.


뉴질랜드 와서 이사까지 끝내면 나는 정말 못할 게 없을 것 같다. 아, 차를 사야 하는 미션이 남았구나. 차를 사면 뉴질랜드 완전 적응 도장을 찍도록 하자. 일단 미리 주문해 놓은 침대 프레임부터 옮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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