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과 연결된 공간
“환상이 없는 삶은 죽음과 가까운 것 같아요.”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본 드라마에 나왔던 말이에요. 환상은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죠. 평상시보다 더 크게 박동하는 심장이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맹렬하게 느끼게 해 주고요. 그러니 환상이 없는 삶은 심장이 뛰기를 멈춘, 죽음과 비슷할 거예요. 그런데 공연은 삶에 환상을 연결해주는 통로 같아요. 아름다운 무엇, 영혼을 고양시키는 무엇의 존재를 믿게 해 주니까요. 심장이 반응하며 격렬하게 두근거리면서 우리 안에 슬프고 아름다운 무언가에 전율하고 반응하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알려줘요. 그래서 공연을 보러 갈 때면 평소보다 신경 써 꾸미고 나가요. 어떤 멋진 세계로 입장하기 위해 나를 단장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르겠어요. 환상으로 연결되는 삶은요.
여러 해 전 파리에서 한 달을 살았던 적이 있어요. 당시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솔드 아웃인 발레 <마농>의 티켓을 당일 오페라 가르니에에 가서 구했더랬어요. 맨 뒷줄이었지만 10유로밖에 안 하는 표가 남아 있었지 뭐예요. 여행 가방을 뒤져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고 공연 시간에 맞춰 오페라 가르니에에 갔어요. 환하게 불을 밝힌 오페라의 내부는 석상과 장식품으로 화려했고, 영화나 소설 속에서 보아온 연회장을 연상시키는 계단과 장식에 파티에라도 초대받은 양 들떠올랐죠.
아무 정보 없이 갔는데 글쎄 그날 공연은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별, 오렐리에 듀퐁의 마지막 무대라지 뭐예요. 우리에게 찾아온 이 모든 우연이 어찌나 커다란 행운 같던지요. 더군다나 10유로짜리 자리는 꼭대기 4층이었지만 오른쪽 가장자리라 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었어요. 천정에는 샤갈의 몽환적인 그림이 가득하고 샹들리에는 눈부시게 빛나고……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오페라 공연장 안에 앉아, 공연도 시작되기 전에 ‘오늘이라는 공연’의 주인공이 된 듯 낭만적인 기분에 두근거렸죠. 서서히 홀이 어두워지고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을 때 홀 안을 한 바퀴 휘둘러 보았어요. 어둠에 서서히 흐려지는 장식과 휘장들, 황홀한 기운에 휩싸여 마치 과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어요.
<마농>은 드라마 발레로 춤의 기교뿐만 아니라 인물의 내면 심리 연기가 중요한 발레 레퍼토리예요. 그런데 무용수들이 어찌나 연기를 잘하던지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했어요. 그리고 오렐리에 듀퐁,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어요. 온몸으로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특히 그녀의 팔, 그녀의 팔은 손가락 끝까지 섬세하게 감정을 풀어내고 있었어요. 동작 하나하나에서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던 그녀는 사랑스럽고 순수한 마농 그 자체로 공연 내내 우리를 사로잡았어요.
1막 2장의 사랑에 빠진 두 주인공의 파드되는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홀려 놓았는데요, 사랑의 환희와 설렘이 넘쳐흐르는 두 무용수의 몸동작을 바라보는데 숨이 멎을 것만 같았지요. 한 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그때 아마 저도 모르게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아 쥐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극 속으로 완전히 빠져든 저는 이미 무용수의 마음이 되어 무대 위에서 날아오르고 있었을 거예요.
공연이 끝나고 막이 내리자 환호와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나왔어요. 오늘의 주인공 오렐리에 듀퐁이 무대로 나오자 객석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열광적으로 환호했지요. 무대 위에서는 금박 종이들이 흩날리고 관객들의 박수와 환호성은 30분 가까이 이어졌어요. 파리가 오렐리에 듀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녀를 보내는 것에 얼마나 아쉬워하는지 고스란히 느껴져 뭉클했어요. 오페라를 가득 채운 열기와 박수 소리 속에서 마치 이 커뮤니티의 일원이 된 것 같은 뜨거운 감정을 느꼈으니까요.
오렐리에 듀퐁, 그녀가 헌신했던 무대가 있고, 그 무대에서 감동받았던 관객들이 그녀에게 돌려주는 애정 어린 박수 소리가 귓전에서 울려 퍼졌어요. 공연보다 더 극적인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어쩌면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그 장면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발레라는 세계에 자신의 젊음을 바친 오렐리에 듀퐁이 관객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씬이요. 그녀에겐 새로운 2막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1막을 얼마나 멋지고 값지게 연기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어 저에겐 특별히 감동적이었어요. 그녀를 바라보며 손바닥이 달아오르도록 박수를 치던 그때, 이번에는 한 사람의 인생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듯했죠.
단순히 무용수와 관객이라는 관계를 넘어서는 뜨거운 진심 같은 게 느껴졌다면 저의 착각일까요. 발레를 향한 사랑으로 무용수와 관객이 완전한 교감을 나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싶었어요. 어떤 공간에서 사람들이 언어를 넘어서는 교감을 주고받고, 대화 이상의 친밀감을 공유할 수도 있다고요. 그 순간만큼은 오페라 가르니에에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오렐리에 듀퐁이라는 별에서 뿜어져 나온 그물 속에 담겨 있는 것 같았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그물, 이 공간을 벗어나면 사라져 버릴 그런 그물. 발레와 무대를 위해 자신을 소진했던 열렬한 삶에 대한 존경과 감사, 환희와 환상이 뒤섞인, 금줄로 짜인 빛나는 그물 말이에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열정적으로 빠져들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한 우리는 젊음을 살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날의 기억을 더듬는 사이 저를 사로잡았던 오페라의 불빛과 열기, 환호성, 우레 같은 박수 소리가 되살아나는 것 같아요.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치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젊음의 묘약이라도 마신 듯 달아오르던 열기가, 우연의 조합이 만들어낸 행운으로 반짝거리는 밤이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는 게 인생이라고, 그 밤 숙소로 돌아가며 외웠던 주문을 다시 한번 걸어봅니다. 파리, 오페라, 축제의 밤. 환상일지라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꿈을 품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