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시간
아파트 단지 샛길 옆에는 나뭇잎 정령이 사는 곳이 있다. 샛길 옆 공터로는 다른 곳보다 바람이 잘 모인다. 그래서 낙엽이 쌓이고 바람 따라 나뭇잎들이 춤을 춘다. 잎사귀들은 신기하게도 선회 운동을 반복하면서 작은 구역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아이와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에 등장했던 바람의 정령을 떠올린다. 하지만 우리 앞에 있는 건 나뭇잎 정령이다. 유독 나선형으로 춤추길 좋아하는, 선회 운동하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가라앉길 거듭하는 나뭇잎 정령들. 우리는 비밀스레 그 몸짓을 구경하고 거기 숨은 신호가 무얼까 궁금해한다. 둥글게 원을 그리던 나뭇잎들이 갑자기 위로 높이 떠오른다. 메마른 바람이 차다.
날씨가 영하로 떨어졌다. 곱게 물들었던 나뭇잎은 말라가고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다. 차가운 바람이 불면 마음에 한기가 들고 몸이 움츠러든다. 거리의 풍경이 어두워질수록 따스한 것이 그리워진다. 쨍한 햇살과 선명한 빛깔의 과일과 꽃들, 그것이 내뿜던 활기와 명랑한 기운이.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뜨끈한 것들의 포옹이.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트에 들러 찬거리와 귤을 샀다. 장바구니를 드느라 밖으로 나와 있는 손이 시려 빨리 집에 도착했으면 싶었다. 따뜻한 집에서 담요 덮고 아이와 귤 까먹는 상상을 했다. 거실 바닥이 차가우니 러그도 꺼내 깔아야겠구나. 언제든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게 새삼 고마웠다.
거실 중앙에 놓인 테이블을 한쪽으로 옮기고 바닥에 러그를 깔았다. 아이가 자신이 좋아하는 분홍색 작은 담요를 가져다 그 위에 펼쳤다. 레고 상자를 들고 와 바닥에 부려 놓고 곁에 앉아 놀았다. 오후 5시 정도가 되었을 뿐인데 창 밖으로 어둠이 내렸다. 거실 구석에 있는 스탠드를 켜자 노란빛이 공간에 스며들었다. 거실의 온도가 3도는 높아진 것 같았다.
아이 곁에 앉아 귤을 까먹으며 레고로 집 짓기를 했다. 작년에 이사 온 후 크게 정을 주지 않았던 집이다. 그런데도 바깥의 풍경이 잿빛으로 변하고 찬바람이 마음을 쓸쓸하게 하는 계절에는 집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구석구석 내 손길이 닿아 편안한 곳, 창 밖으로 내가 좋아하는 나무와 하늘이 보이는 곳. 우리 가족의 삶을 말없이 지켜보며 보듬어 주는 집.
“서윤아, 엄마는 우리 집이 참 좋아.”라는 말에 아이도 그렇다고 했다. 러그를 깔아주자 “우와” 하며 신나서 폴짝 뛰고 평범한 귤일 뿐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맛있어”라고 감탄하는 아이가 곁에 있어 그랬을까. 노란 불빛 아래서 상상 속 집을 지으며 추운 겨울이 오더라도 이 집에서 만은 온기와 채도를 지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건. 그래서 우리가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다고 마음속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릴 수 있었던 건.
아이가 앉아 있던 거실 풍경을 사진으로 찍었다. “엄마 뭐해?”라고 묻는 아이에게 이 순간의 기분과 우리 집의 모습을 기억하는 거라고 했다.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에 절실한 이 기분을, 이곳에 고유하게 머물고 있는 따스함을.
창 밖 풍경은 흑백 사진처럼 채도를 잃어가고 있지만 나의 집에서 만은 색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이와 함께 다채로운 빛깔로 생활을 꾸려 가야지. "가족을 지켜줄게. 집의 시간을 기억할게." 집의 목소리가 들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