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는 자리

집의 시간

by 춤추는바람




이사를 앞두고 있다. 집은 삶의 토대인지라 집을 옮기는 일은 매번 커다란 벽을 옮기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진다. 어쩔 수 없는 불안과 걱정이 마음을 파고든다. 멈춰 있을 때엔 변화의 흐름으로 들어가는 게 두렵지만 일단 움직임 속으로 한 발 들여놓으면 감정은 서서히 바뀐다. 어차피 움직여야 한다면 가능한 좋은 쪽으로, 조금 더 즐거운 방식으로 해보자고. 그러는 사이 변화가 불러온 새로운 기운에 물들기도 한다. 익숙한 것을 남겨두고 낯선 곳으로 이동하려는 사이 새롭게 발견하게 될 가능성과 기쁨을 기다리게 된다.




집은 계약할 당시 무척 낡아 있었다. 지은 지 이십 년이 넘은 아파트인데 그 사이 한 번도 수리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운 좋게 우리가 들어올 때 싱크대 교체와 화장실 수리, 그리고 도배를 해주겠다는 조건이 있어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만 믿고 계약한 집이었다. 이미 살고 있던 동네라 위치에 대한 이해가 있어 아파트의 이 동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던 터였다. 그 위치에서 바라보이는 경치가 아름다울 거라는 걸 알았고 그걸 배경으로 두는 삶이라면 나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내부가 낡아 계약을 하고도 걱정이 많던 남편에게 남서향이라 저녁에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꽤 아름다울 거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해가 저무는 풍경을 바라보는 삶을 내 멋대로 상상하곤 했다.



이사 들어와 보니 베란다 아래로 생각지 못한 작은 공원이 있었다. 공원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크기라 좁다란 오솔길이라 하는 게 더 적당하려나. 그래도 위에서 내려다보면 제법 나무가 우거져 커다란 숲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해가 서편으로 넘어갈 때면 바람이 숲을 쓸고 가는데 그때마다 푸른 잎사귀들이 물결치듯 일렁였다.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그 안으로 빨려 들 것 같고 푸르른 융단 위에 둥실 떠 있는 것 같기도 해 기분이 묘했다. 창백한 건물들이 들어선 아파트 속에 있지만 집에 와 창 밖을 보는 순간 숲에 들어왔다는 착각에 빠졌다. 집에 놀러온 사람들은 그걸 보고 여행지의 콘도에 온 것 같다고 했다.



봄이면 작은 숲에 여린 초록의 잎사귀들이 돋아나 싱그러운 바람을 일으켰고 그 너머로 보이는 산책로를 따라 벚꽃이 만발했다. 여름이면 작은 숲이 깊고 짙은 초록의 바다가 되었다. 가을에는 울긋불긋하게 물이 들었고 겨울에는 검게 빈 숲에 흰 눈이 쌓였다.



창으로 들이치는 햇살로 아침을 알았고 봄 여름엔 새들의 경쾌한 노랫소리에 잠을 깼다. 외출 후 돌아오면 오후의 햇살이 거실을 노랗게 채우고 있고 벽면으로 빛과 그늘이 만드는 경계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하루에도 수시로 구름을 보며 시시각각 변하는 모양에 감탄하고 즐거워했다. 저녁이면 높은 곳에서 짙어지는 파랑과 낮은 곳에서 강렬해지는 오렌지빛이 만나 황홀한 대비를 그려내는 하늘을 보며 하루치의 위안을 얻었다. 창 밖의 풍경과 베란다 아래 작은 숲은 애초에 바랐던 것 이상으로 삶을 바꾸어 놓았다. 매일 해가 지는 시간을 기다렸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늘을 챙겨 보았으니 지난 2년은 내 삶에서 시간과 계절의 흐름을 가장 가까이서 깊숙이 느끼며 생활한 시기였다.



봄날이면 베란다에 테이블을 펼치고 피크닉 나온 사람들처럼 저녁을 먹었고 여름이면 간이 풀장을 설치해 물놀이를 했다. 아이와 둘이 창 앞에 나란히 앉아 저녁노을이 번지며 시시각각 물들어가는 하늘을 지켜보기도 했고 소파의 위치를 바꿔 창을 향하게 놓아두고 하염없이 구름을 헤아리며 앉아 있기도 했다. 그랬던 시간의 기억은 어디에 담겼을까. 우리의 눈과 이마에, 손등이나 무릎 위에 새겨지지 않았을까. 어쩌면 소파나 테이블, 나무 의자 위에 보이지 않게 흔적이 찍혔으려나.



주말 새 집을 보고 간 신혼 부부가 계약 의사를 밝혔다. 그들에게서 이 집에서의 삶을 꿈꾸는 모습을 엿보았다. 오래된 아파트라 어쩔 수 없이 낡은 부분이 있고 새 아파트처럼 쾌적하고 반짝거리는 구석은 없다. 그런 걸 바라는 사람들에겐 이 집은 볼품없는 헌 집일 뿐이다. 하지만 창 밖으로 하늘과 나무를 기대하고 햇살이 넘실거리는 집을 원하는 사람에겐 충분히 매력적인 집일 수 있다. 그들이 베란다를 들락거리며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관심을 보이고 주변 공원 위치를 확인하는 걸 보며 우리와 취향이 맞닿은 사람들 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집의 구조와 상태만 살피는 게 아니라 집을 바탕으로 만들어갈 삶을 그려보는 것 같아 반가웠다. 창 밖을 주의 깊게 살피고 가구 배치나 공간 사용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 넓은 안방과 거실을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에서 가족이 함께 보내는 시간과 공간의 쓰임을 중시 여긴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모습이 반영된 공간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건 삶에 대해 가지고 있는 밑그림이 비슷하다는 의미일 수 있다. 우리가 가꿔 놓은 집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고 그들이 염두에 둔 삶의 그림을 맞춰 보며 앞으로의 생활을 상상하고 있을 테지. 그동안 이 집에서 쌓아왔던 우리의 생활이 누군가의 삶으로 연결되는 것 같아 기뻤다. 집을 통해 삶의 한 조각을 공유하게 되는 것 같아 떠나는 마음이 덜 아쉬웠다.



회사를 다니던 시절,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면 집안의 물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일제히 나를 바라보며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어둠이 스며들 무렵, 길게 그림자를 늘이고 풀 죽어 있던 가구와 사물이 나의 등장과 함께 다시 활기를 되찾곤 했으니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들이 나를 반겨준다고 느꼈다. ‘집에 돌아왔다’,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감각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니까 집에 간다는 건,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걸 의미했다. 집은 본래 내가 있어야 하는 자리로 존재한다. ‘내가 있는 자리’로서의 집, 내가 있어야 완성되는 집. 그래서 집은 나의 일부이며 나는 집의 일부가 된다.



집은 나를 담아내고 보여준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마음에 들어 했던 사람들은 창 밖의 풍경과 집안의 원목 가구들, 그리고 잘 자란 화분 속 식물을 좋아했다. 우리가 삶에서 중심에 두었던 것을 단번에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집이 비밀스레 말을 걸고 신호를 보냈겠지.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 내가 담긴 이 집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고 이곳에서의 삶을 꿈꾼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다. 나의 일부였던 집을 기쁘게 넘겨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이사 가게 될 집은 지금과는 다른 부분을 보고 선택한 곳이라 이후의 생활이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집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들어가 살기 전까지 그 집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집의 시간은 우리와 함께 새롭게 시작될 테니까. 거기서는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하늘과 나무가 보일 테고 확 트인 뷰가 없는 대신 단지 옆에 붙어있는 공원을 더 가까이서 즐기게 될 것이다. 주방과 서재방이 더 넓어질 테니 생활 패턴에도 변화가 생기겠지. 집이 바뀌면서 삶에도 자연스레 새로운 장면이 추가될 것이다.



그 집에는 어떤 내가 담기게 될까. 그곳에선 어떤 시간을 기다리게 될까. 우리를 끌어안아 줄 새로운 친구가 거기서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