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

시간이 머무는 곳

by 춤추는바람




짧고 강렬했기에 더 애틋하고 안타깝고 그리운 시절이 있다. 불안하고 외로워 미친 듯이 흔들렸지만, 그래서 세상 모든 것에 경계가 없던 시절, 무엇이든 열렬히 사랑할 수 있었던 시절, 젊음만으로 모든 가능성을 움켜쥐고 있던 때가.



코로나 확진으로 일주일을 호되게 앓았고 어제부로 격리가 해제되었다. 아침부터 서둘러 나가 실컷 꽃을 보았다. 며칠 새 계절은 성큼성큼 걸어 나가 여름 언저리에 닿았더라. 격리 전 패딩을 입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반팔을 입어야 할 날씨로 바뀌었다. 맨살에 닿는 바람이 좋았다. ‘사랑 사랑’하듯 바람이 불었다.



급속한 계절의 변화에 어리둥절하면서도 나뭇가지마다 까치머리처럼 돋아난 여린 어린잎이 싱그러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연둣빛 푸른색을 띠는 작고 귀여운 잎사귀들. 막 걸음마를 뗀 아가를 보듯 애틋하고 대견한 마음.



공기 중에 ‘봄’이라는 향수라도 뿌린 걸까. 기름종이라도 한 장 겹쳐 놓은 걸까. 파스텔 톤으로 뒤덮인 봄의 풍경에는 아스라한 기운이 뒤덮여 있다. 살랑이는 그 기운이 사람 마음을 간지럽힌다. 누구라도 만나야 할 것 같고 어디라도 떠나야 할 것 같은 싱숭생숭한 기분. 오래도록 그리워했던 이를 만나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계절이다.



비 소식이 있어 저녁에도 산책을 나섰다. 동네 뒷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엔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어스름한 기운 속에서 연분홍빛 꽃무리가 그려내는 사랑스러움이란. 이토록 꽃이 풍성하게 피었던가 새삼 감탄하며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고 꽃 속으로 빠져들 듯 그렇게 걸었다. 천천히,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음을 새며.



하얀 꽃송이를 매달고 기다란 가지를 가없이 늘어뜨린 나무를 가로수 조명이 은은하게 비추었다. 하늘에도 바닥에도 하얀 꽃잎이 가득. 어슴푸레한 빛무리 속에서 수줍게 웃고 있는 꽃무리들. 그 속에 푹 파묻혀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 버렸을 땐,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혹은 실연당한 이처럼, 마음을 송두리째 네게 던지고 싶었다. 그 시절엔 꽃이 아름다운지 몰랐고, 지금은 꽃 같던 사람들 곁에 없으니. 다시 한번 그때 그 사람들 속으로 돌아가 볼 수 있다면……, 하는 부질없는 바람을 중얼거리다 깨달았다. 인생은 한 발 늦게 깨닫는 진실로 생에 대해 끝없이 애 태우게 하는 거라는 걸.



밤새 비가 내렸고 창 밖의 풍경은 어제와 사뭇 다른 표정이다. 꽃이 풍성하던 가지는 헐거워졌고 잎사귀의 색도 한 톤 짙어졌다. 하루새 뒤바뀌는 풍경의 색채라니, 이토록 허무하게 사라지는 게 봄날인가.



세상을 다 가진 듯 부풀어 올랐던 그 시절의 마음도, 이토록 허무하게 스러졌던 것 같다. 정의를 외쳤고 만인에 대한 사랑을 말했는데,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며 살겠다고 꿈꿨는데. 그토록 넓고 푸르르던 마음은 몇 년 사이 허물어졌고 그 뒤로는 낙오자가 된 것처럼 남들 쫓아가느라 허덕거렸다. 현실은 이상과 달랐고 그 속에서 선택할 수 있는 건 꿈꿨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양과 빛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꿈은 컸지만 꿈을 지켜 내기엔 나약했을 것이다. 수차례 헛발을 짚고 무릎이 꺾인 뒤로는 남들만큼만 살았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달렸던 것 같다.



청춘이라 부를만한 시기가 참으로 짧았다. 자고 나면 빛깔이 변해 있는 봄날처럼. 그토록 짧게 스치듯 지나갈 줄 몰라 아까운 시간을 많이도 낭비했다. 하지만 낭비야말로 청춘의 특권일 테지. 쏟아내고 쏟아내고야 바닥을 칠 수 있으니 말이다. 낭비라는 특권만은 마음껏 누렸구나 싶다.



그렇게 푸르렀던 밤들이 스쳐 지나간다. 꽃향기 가득하고 풀내음 진동하던 교정, 그 어둠 속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웃고 이야기 나누었던 밤들이 건너올 것만 같다. 다들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때의 우리는 어디서 살아가고 있을까.



해마다 봄이면 건너오는 기억을 코끝에서 사라지려는 꽃내음처럼 더듬어보다 눈앞의 생에 열렬해진다. 이 시간도 지나갈 것이다. 애타게 손을 뻗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