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를 굽고 글을 씁니다
베이킹 스튜디오의 이름은 ‘느린산책’이다. 베이킹을 할 때면 손 끝의 움직임에 온전히 집중하게 된다. 그렇게 집중하는 사이 순수한 즐거움이 솟아났다. 어떤 순간엔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 같았고, 너무 좋아서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천천히 걸으며 발걸음에 집중하고 사소한 것에 마음을 기울이게 되는 산책에서 느끼는 기분과 비슷했다. 그렇게 몰두하고 나면 텅 비었던 마음에 온기가 감돌고 기쁨이 차 올랐다. 바쁘게 쫓겼던 일상에 잠시 쉼표를 찍고 손을 움직이며 무언가를 만들고 집중하는 사이 산책을 다녀온 것처럼 마음이 새로워졌다. 그런 휴식의 시간을 사람들에게 선사하고 싶었다. 그런 바람을 담은 이름이 바로 ‘느린산책’이다.
처음 수업을 시작할 때 블로그를 만들고 인스타 계정을 열였다. 그리고 느린산책의 첫인사를 적어 올렸다.
“천천히 걸어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쁘게 지나치는 일상 중 잠깐 숨을 고르거나 천천히 걷듯 휴식을 취하는 순간에는 차 한 잔, 쿠키 한 조각, 꽃 한 송이, 책 한 권이 충분한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작지만 충분히 아름답고 따스한 것, 그런 것을 나누고자 합니다.
함께 천천히 시간을 산책할 분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여기, '느린산책'에서”
느린산책을 시작하던 나의 첫 마음은 그랬다.
원래는 작은 공방 자리를 얻을 생각이었다. 월세 부담이 적고 혼자 운영할 수 있는 정도의 작은 공간 말이다. 그런데 막상 가게 자리를 알아보니 조건에 맞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디저트 판매까지 고려하고 있던 상황이라 영업 허가가 나오는 시설이어야 했고 베이킹을 위해서는 가게 내부 수도 시설은 필수였다. 월세가 예산과 맞는다 싶으면 수도 시설이 안 되어 있거나 영업 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 예산이 넉넉지 않아 인테리어도 직접 할 계획이라 어느 정도 모양이 갖춰져 있어야 하는 것도 빠뜨릴 수 없었다. 그렇게 몇 군데를 둘러보다 카페 자리 하나를 발견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정확히 두 배는 컸다. 월세도 딱 두 배만큼 비쌌다. 하지만 수도시설도 갖춰져 있고 화장실도 내부에 있었다. 카페를 했던 자리라 허가에도 문제가 없었다. 크게 손을 대지 않은 공간이라 페인트칠만 하고 집기만 들이면 될 것 같았다. 큰길이 아니라 한적한 안쪽 길에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초등학교를 마주하고 있는 주택가였다. 주변엔 동네 슈퍼와 부동산, 몇 개의 작은 가게들이 있었고 맞은편에는 꽃집이 있었다. 꽃집 사장님은 베이킹 수업에서 만나 안면이 있는 사이이기도 했다. 월세가 부담스러웠지만 나머지 조건들이 모두 마음에 들었다. 욕심이 났다.
덜컥 계약했다. 계약을 해버렸으니 준비할 게 많았다. 사업자등록증 변경과 영업허가증 등 서류 준비에서부터 공간을 꾸미고 집기를 채우는 것까지 혼자서 해결해야 했다. 욕심내어 큰 공간을 얻었으니 클래스만이 아니라 판매까지 하면서 수익을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판매할 메뉴도 추려야 했고 명함이나 포장재 등도 갖춰야 했다. ‘느린산책’이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를 공간과 메뉴에 담아내야 했다. 편안하지만 단정하면서 우아한 멋이 있는 곳이었으면 싶었다. 소박하고 담백하면서도 정성이 느껴지는 디저트를 내놓고 싶었다.
특별한 날을 빛내 줄 화려한 케이크보다는 매일의 일상에 작은 쉼표가 되어줄 소박한 케이크가 더 좋았다. 엄마가 아이에게 내어주고 싶은 케이크, 업무에 지친 동료의 책상 위에, 수고한 내 책상 위에 슬쩍 올려놓고 싶은 케이크, 친구와, 또는 연인과 한 입 씩 나눠 먹고 싶은 그런 케이크와 작은 과자들을 만들고 싶었다. 좋은 재료를 써서 자연스럽고 단정하게 멋을 낸 케이크와 투박해도 정성이 느껴지는 과자를 고민했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고 커피 한 잔, 차 한 잔 마실 때면 자꾸 생각나는 그런 과자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디저트가 무언지 생각해 보았다. 마들렌이나 파운드케이크, 사과 타르트나 스콘. 하나같이 클래식한 것들이었다. 올드할 수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이 찾는 품목이기도 했다. 구움 과자와 파운드케이크, 그리고 스콘, 계절에 맞춘 과일 타르트가 메뉴로 정해졌다.
공간을 꾸미는 일이 문제였다. 예산은 한정되어 있고 처음 해보는 것이라 끝없이 문제에 봉착했다. 무수한 고민과 결정의 연속이었다. 비용과 직결되기에 선택은 더 어려웠다. 힘들게 결정해서 실행하면 생각했던 것과 달라 실망하기 일쑤였고 예상보다 큰 비용이 들어 좌절하기도 했다. 머릿속으로 한참 상상하고 그림으로도 그려보았던 것을 막상 공간에 구현해 보면 생각과 다른 경우가 많았다. 고심해서 산 물건이 실제로 보니 별로여서 속상해하기도 했다. 부족한 건 끝없이 나타났고 계속 돈들 일만 생겼다.
카페에 있던 집기가 빠져나가고 남은 공간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며칠은 잠을 설치며 공간을 구상했다. 기존에도 하얗게 칠해져 있던 벽이지만 물건이 나가고 드러난 벽면엔 얼룩이 남아 지저분했다. 우선 남편과 함께 페인트칠부터 다시 했다. 카페일 때 커다란 칠판에 가려져 있던 창문에는 불투명 유리가 끼워져 있어 난감했다. 고민 끝에 투명 유리로 교체하고 창틀도 흰색 시트지로 바꾸었다. 급한 대로 작고 저렴한 것으로 들인 싱크대도 이케아에서 상판과 싱크볼, 손잡이 등을 사서 리모델링했다. 베이킹 스튜디오에서 쓸 대형 테이블과 의자, 카운터 용 가구만 가구 공방에 맡기고 그릇장은 목공소에서 짜 온 후 직접 마감을 하기도 했다. 반나절 동안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레터링을 해온 입간판과 직접 골라 주문한 식물들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내 머리와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었다. 힘들었지만 그래서 공간에 더 애착이 갔다. 아무것도 없던 텅 빈 공간이 손수 고른 물건과 직접 만든 것, 아꼈던 그릇과 장식품으로 채워졌다.
인테리어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스튜디오의 외관에서부터 화장실, 주방에서 사용할 포크 하나까지, 준비해야 할 목록은 끝이 없었다. 어느 순간 공간을 완벽하게 꾸미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매달리다 보면 영영 가게를 오픈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필수적인 것만 마무리하면 우선 오픈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실제로 일을 진행하면서 필요한 것을 보완하는 게 낫겠다 싶었으니까. 예정된 날짜보다 며칠 앞서 가오픈을 하기로 결정했다.
드디어 가오픈 날. 전날까지도 모든 게 뒤죽박죽인 것 같아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급한 것부터 하나씩 해결해 나가자 어찌어찌 손님 맞을 모양새가 갖추어졌다. 매장은 깔끔하게 정리되었고 매대도 그럴듯하게 차려졌다. 영업이 시작되었다. 지인들이 다녀갔고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도 발걸음을 했다. 인스타그램을 보고 왔다는 사람도 많았고 맛있다는 칭찬도 들었다. 혼자 디저트를 만드느라 매대가 비면 케이크와 스콘을 굽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시간이 갔다. 그런데도 흥과 즐거움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혼자였으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가게를 준비하면서부터 집안일을 더 챙겨해 주었던 남편은 그날도 가게에 와서 카운터를 봐주었고, 돌아가며 카운터를 보고 설거지를 도와준 친구들과 오픈이라며 구석구석에 예쁜 꽃을 놓아준 건너편 꽃집 사장님 도움도 컸다. 가게 열었다고 먼 데서 찾아와 준 지인들, 인스타그램과 블로그를 통해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건넨 용기도 한몫했다. 동네에서 공방을 한다는 분, 근처에 책방을 운영하는 분들도 다녀갔다. 좋은 공간이 생겼다며 내일처럼 기뻐해 주셨다. 느린산책의 등장으로 상권이 활성화되길 바란다는 말씀도 반가웠다. 아기 엄마였던 내가 동네의 문화생활 교류에 끼게 된 것 같아 신기했다. 가게를 직접 운영하는 처지가 되니 근처 사장님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남달랐다. 연대감 같은 게 느껴졌다.
‘느린 산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첫날을 무사히 보내자 자신감이 생겼다. 몸이 으스러질 듯 아파 앞으로 어떡하나 걱정도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싶어 안도했다. 지나치게 욕심내지 않고 즐거운 마음을 잃지 않으면 그럭저럭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근처에 있는 공방과 책방, 꽃집 사장님들과 함께 하게 될 ‘금호동 라이프’*에 대한 기대로 모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베이킹 스튜디오 ‘느린산책’은 금호동에 위치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