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마음이 먼저 하던 일

케이크를 굽고 글을 씁니다

by 춤추는바람

느린산책을 열고 한 달 남짓의 시간이 흘렀다. 스튜디오를 갖는 것과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라는 걸 깨달은 시간이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맞춰 매대를 채우고 가게 문을 열고 닫는 일이 생각보다 힘들고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떤 날은 오지 않는 손님을 하염없이 기다리느라 진이 빠졌고 어떤 날은 급작스레 몰린 주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바쁘기도 했다. 힘들게 번 돈을 월세로 내야 할 때면 억울한 마음이 들었고 디저트만 만들면 될 줄 알았는데 설거지에 청소, 자잘한 매장 관리가 시간을 빼앗았다. 스튜디오를 열기 전에 했던 질문은 ‘잘할 수 있을까?’였다. 가게를 열고나자 바뀌었다. ‘계속 좋아할 수 있을까?’ 문을 열고야 맞닥뜨린 현실이 첫 마음을 자꾸 흔들었다. 그럴수록 마음을 다독여야 했다. 진짜 힘은 좋아하는 마음에서 나오니까.


하지만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 집을 벗어나 육아와 가사로부터 분리되어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한동안 아이와 둘이서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세상과 단절되어 있다고 느꼈다. 스튜디오에서는 문만 열고 나가면 세상이 펼쳐졌다. 작은 문을 열고 세상이 나를 만나러 오기도 했다. 가게는 세상을 향해 낸 통로 같았다. 만나기 힘들었던 친구들을 데려다주었고 만날 수 없었을 사람들을 연결해 주었다. 가게 전면의 통창에는 커튼도 달지 않았다. 세상을 만나기 위해 투명하게 열어놓고 싶었다.


종종 연락도 없이 선물처럼 사람들이 도착했다. 먼 데서 일부러 찾아오는 지인들이 있었고 연락이 끊겼던 직장 상사분이 지나는 길에 들렀다면 찾아오기도 했다. 어떤 날엔 느린산책에 잘 어울릴 것 같다며 그림책을 놓고 가는 분도 계셨다. 이웃에 있는 책방 사장님들도 오가는 길에 들러 책을 선물해 주셨다. ‘카모메 그림책방’ 사장님은 느린산책에 있어야 한다며 그림책 <브래드 씨의 이야기>를 주셨고, 독립출판서점 ‘프루스트의 서재’ 사장님은 우체국 가는 길이라며 여행 책 한 권을 건네고 가셨다.


불쑥 찾아와 무턱대고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해준 후배도 있다. 오븐에 들어간 피낭시에 반죽이 부푸는 걸 보며 신기하다고 감탄사를 터뜨리는 후배의 모습에 같이 웃었다. 여행에서 막 돌아와 상기된 얼굴로 찾아온 후배도 있었다. 손에 들고 온 쇼핑백에는 느린산책에 딱 어울리는 케이크 책이 들어 있었다. 책장마다 알록달록한 색으로 그려진 디저트와 디저트에 얽힌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런 날이면 괜스레 더 즐거웠고 맛있는 걸 많이 만들어 두어야겠다 생각했다.


오가며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늘었다. 단골손님이 생겼고 옆집 슈퍼 사장님, 복덕방 사장님과도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날마다 놀러 오는 꽃집 ‘시티블룸’ 사장님과 잊을 만하면 찾아와 주는 바느질 공방 ‘하루네 집’ 사장님이 있어 금호동 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한가할 즈음이면 귀신처럼 찾아오는 친한 친구와 아끼는 후배들은 1인 사장의 삶을 외롭지 않게 해 주었다.


느린산책 맞은편 꽃집 사장님과는 점심 식사 짝꿍이 되었다. 그래서 꽃집 사장님이 여행을 가거나 아파서 얼굴을 못 보는 날이면 기운이 빠지고 허전했다. 한동안 배앓이로 식사를 못하다 다 나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반가운 마음에 파스타를 만들어 대접했다. 어떤 날엔 육아에 지친 친구를 초대해 밥을 해주기도 했다. 그날은 아침부터 따가운 햇살에 차가운 샴페인이 있으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나물과 자몽에 차돌박이 구워 올린 샐러드와 파스타, 그리고 샴페인 하나로 테이블은 파티 분위기를 풍겼다. 잔에서 피어오르는 기포 방울처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느린산책을 채울 때, 건네고 싶었던 위로는 내 어깨 위로도 내려앉았다.


느린산책에서의 일상은 케이크와 과자를 만드느라 정신없이 흘러갔다. 그러다가도 드물게 가만히 멈춰 있는 시간이 찾아왔다. 차 한 잔,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은 귀해서 더 달콤했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기다림이 찾아왔다. 지난번에 오셨던 손님은 안 오시나, 이웃 사장님은 언제 놀러 오려나, 그 친구는 언제 올까……. 사람을 향한 기다림만은 아니었다. 느린산책을 채운 식물들이 자라는 모습을 기다렸다. 화분의 새 잎은 언제 돋으려나, 꽃몽우리는 언제 열리지, 꽃이 진 자리엔 무엇일 자랄까. 시키지 않아도 마음이 먼저 가 기다렸다.


느린산책에서 제일 좋았던 건 기다림이었다. 오늘은 누가 올까, 오늘은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오늘은 어떤 꽃이 필까. 누군가를 기다리고 꽃의 미래를 점쳐 보며 매일을 기다렸다. 하루의 일도 기다림으로 시작되었다. 매일 SNS에 그날 나올 디저트를 올리며 적었다. ‘오늘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마음이 먼저 가 서성이는 날들이었다.












keyword
이전 09화나만의 작은 가게, '느린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