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캠핑
저녁을 먹고 숙소 앞 슈퍼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샀다. 이틀 사이 대여섯 번은 들러서인지 이 마을(오즈)에서 두 번째로 익숙한 장소다. (첫 번째는 당연히 숙소) 계산을 하는데 캐셔 아줌마가 툭 던지는 말.
“좋은 하루 보냈니?”
갑작스러운 그 인사에 “yes, thank you"라고 밖에 말하지 못했지만, 나의 표정만은 반가움을 숨길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신은요?“라고 묻지 않은 걸 후회할 만큼 기뻤으니까.
내 답에 “Good!"하고 공감하며 환하게 웃어주던 아줌마 덕에 잠시 우리 사이가 가까워진 것 같았다. 습관적으로 건넨 말일지 모르지만 물어준 게 반가워 진심으로 답하고 그런 내 기분을 아줌마가 알아채 주었던 순간만큼은 우리 사이 경계심이 허물어지고 다정한 기운이 오갔다. 아줌마는 돌아서는 내게 멋진 저녁을 보내라는 인사말도 잊지 않았다.
아줌마의 인사말 덕에 환해진 마음으로 동네를 산책했다. 날이 맑아 저녁 늦도록 하늘이 파랬고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오갔다. 저녁을 알리며 무리 지어 날아오르는 작은 새들,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고양이 두 마리, 너른 마당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 떼를 만났다.
이곳에서 물건을 살 때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대체로 그런 식이다. 계산대에 다가서면 안녕하세요로 시작해서 카드를 내밀어 계산을 끝내면 고맙습니다, 그리고 좋은 하루 보내라는 인사로 이어진다. 이들에겐 당연하고 습관적인 말일 테지만 내겐 그 말과 습관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한국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말 없이 계산이 끝나는 때도 있고 필요한 말만 사무적으로 주고받는 일이 흔하니까. 그래서인지 작은 인사와 가벼운 말이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넘어 환대하고 존중하는 뉘앙스로 느껴진다.
어디서든 마주 오는 상대방과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무조건 멈춰 서서 기다리고, 누군가의 진로를 방해했을 때엔 “미안하다” 인사하는 게 당연한 사람들. 나가려고 문을 열었는데 누군가 들어오려 한다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문을 잡고 기다려 주는 것도. 좁은 공간에서 누군가를 마주치면 아슬아슬하게 타인을 스쳐고 지나가는 데 문제점을 느끼지 않고 (심지어 밀치고 가는 사람들도 있지) 설사 누군가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어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게 일상인 서울과는 다르다. 나의 프라이버시와 공간이 중요한 만큼 상대의 것도 존중하는 자세가 인상적이다.
몸에 익은 말, 관습적인 친절, 표면적인 태도일지 모르지만, 생활에서 타인을 존중하고 상대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건 기본처럼 자동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일 테다. 그 모든 게 습관일 뿐이더라도 친절은 친절이고. “환대란 당신을 헤치지 않겠다는 태도”라는 어떤 작가의 말처럼, 작은 친절이 담긴 그들의 말과 태도를 나는 환대라고 느낀다.
그러고 보니 서울에서 자주 가는 동네 야채 가게 아줌마가 떠오른다. 계산을 하고 나갈 때면 ”고마워요.“라는 말을 잊지 않는 분. 마트에서 장 볼 때 한꺼번에 사면 편하지만 굳이 야채 가게를 따로 들르는 건 가격이 더 저렴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줌마의 따뜻한 인사말 때문이기도 하다. 그 말을 들으면 왠지 좋은 소비를 한 것 같고, 이 채소로 맛있는 저녁을 차릴 수 있을 것처럼 신이 난다. 말 한마디의 힘이다.
고마워, 미안해라는 말이 흔하고 쉬운 사회. 그 말을 아끼지 않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말에는 힘이 있어 어딘가 닿으면 말을 넘어서는 의미의 파장을 짓기도 한다. 파도처럼 그 다음의 선한 행동으로 이어진다. 고마워, 미안해라는 말에 닿아 부드럽고 유연해지는 마음들이 있다. 그 마음들이 선하게 바꿔놓을 행동, 그렇게 퍼져나가는 친절과 환대를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