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것의 역사

어쩌다 캠핑

by 춤추는바람



와라타(waratah)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골드 러시 시절 개발되었던 태즈마니아 서부에는 이런 탄광 도시가 여럿 있다. 태즈마니아의 명소로 꼽히는 크레들산 주변으로 탄광촌이 형성되었고 와라타는 그중에서도 규모가 작은 축에 속했던 것 같다. 예전의 영화는 사라지고 지금은 그 흔적만 품은 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듯하다. 태즈마니아의 서부 대자연을 탐험하는 여정의 중간에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간간이 이어진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잔잔하게 물결이 이는 호수가 반겨준다. 주변으로 너른 잔디밭과 드문 드문 큼직한 나무들이 있는데 거기가 캠핑지역이다. 호수 너머로 낮은 집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있다. 초록색, 빨간색, 파란색, 흰색, 레몬색으로 지붕이나 창틀, 울타리에 조금씩 색을 더한 집들. 멀리서 바라보면 그림책 속 마을처럼 아기자기하게 예쁘다.








공기가 맑고 자외선이 강해 파란 하늘은 유난히 시리게 파랗고 투명한 호수는 거울처럼 그걸 되비쳐 준다. 데칼코마니처럼 수평선을 중심으로 똑같은 그림이 위아래로 펼쳐진다. 하늘 아래 하늘, 구름 아래 구름, 집 아래 집.



이 고장은 시간이 부지런히 닳게 만든 오랜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마을 끝에서 시작되는 산줄기의 첫마디에는 탄광지였는지 잘려나간 속살처럼 돌과 흙이 드러난 절벽이 있고 마을 중앙에는 과거 돌을 채굴해 광석을 골라내던 시설(stamper mill-큰 돌을 잘게 부숴 그 안의 금이나 귀한 광물을 골라내는 장치)이 폐물처럼 남아 있다. 초기 개척자들의 이야기를 고이 간직한 박물관과 개척자이자 철학자였던 한 인물(st. James)이 살았던 두 평 남짓한 통나무집도 보이고. 광부들을 본뜬 조형물과 채굴에 사용했던 낡은 도구도 마을 군데군데에서 마주할 수 있다.



무용지물이 된 채 낡아버린 stamper mill은 아직도 버튼을 누르면 굉음을 내며 움직이는데, 소리만 요란할 뿐 그 움직임이란 것이 지금의 시선에는 둔하고 어설퍼 보인다. 박물관에 보관된 물건들도 낡은 도구와 가구, 광물 조각과 오래된 사진 따위로 값나가는 건 하나 없는 듯하고. 박물관 안쪽 방에는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의 사진이 정리되지 못한 채 쌓여 있다. 거기에는 초창기 정착민부터 꽤 최근까지 마을에서 활동했던 주민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학교 과학 실습 시간의 모습, 마을 행사 때 광경, 주일 교회에서의 사람들.... 별 것 아닌 것들도 모두 모아 두었구나, 하는 생각을 따라가다 이런 발견을 마주했다. 이 모든 것이 소중했던 거라고. 사소한 것이 바로 역사라고.



깊은 산속, 황량하고 척박한 땅에 희망을 갖고 용기 내어 발을 내디딘 개척자들. 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그 뒤로도 쇠퇴해 가는 마을에서 자신들만의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마을의 오늘은 없었겠지. 그 모든 노력과 삶이 어찌 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은 거주민도 소수고 찾아오는 이도 별로 없는 한적한 마을이다. 박물관에 모아 둔 물건과 기록은 누굴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자신의 역사를 보존하고 기억하려는 의지의 소산처럼 보인다. 작은 접시 한 장, 커피잔 하나, 낡은 의자와 오래된 편지들. 그건 물건이라기 보다 염원에 가깝다. 그러므로 가치를 계산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 보존하려는 마음이 모여 더없이 귀해진 물건들. 그 속에 깃든 숨결과 영혼을 떠올리는 사이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싶어졌다.



나의 기록도 그럴 것이다. 사소하고 별거 아닌 사진과 글, 메모지만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에게만은 소중하다. 하찮은 역사일지라도 모으고 모아 간직하려는 마음으로 의미가 쌓인다. 어쩌면 모든 대상은 그걸 대하는 이의 시선과 태도로 가치를 갖는지도 모르겠고.



시간을 견뎌낸 것은 그 자체로 존엄을 갖는다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지금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모습에서는 전혀 읽을 수 없는 요란한 과거가 이 마을엔 숨어 있다. 금과 주석 같은 광물을 찾아 몰려든 사람들로 떠들썩했을, 이제는 잃어버린 시간이 된 시절을 상상해 본다. 낡은 고철 덩어리에 불과한 stamper mill과 작은 박물관에 깃든 존엄을 천천히 읽어 내려간다.






호숫가를 지나 언덕을 조금 오르면 잔잔하게 흐르던 물이 일순간 낭떠러지에 다다라 힘차게 떨어져 내리는 폭포를 마주할 수 있다. 호수 앞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급작스럽고 아찔한 절벽의 등장은 이 마을이 지나온 역사의 낙차처럼 보인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박동을 품고 있는, 태즈마니아 서부를 아우르는 산맥이 겹겹이 이어진 풍경을 마주하며 폭포는 위엄차게 떨어진다.



끝 간 데 없는 그 경치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지점에 bischoff hotel & restaurant이라는 오래된 이야기에 등장할 것 같은 건물이 하나 있다. 동네에서 보기 힘든 꼬맹이 셋을 데리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더니 바에 앉아 있던 하얗게 턱수염을 기른 할아버지가 우릴 보며 환히 웃었다. 우리가 앉은 옆 테이블에서 친구와 환담을 나누던 할아버지 한 분은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잠시 후 우리 곁으로 와 기념으로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여기에 한국 사람이 온 건 처음이라며 진심으로 감탄하면서.



그 할아버지가 호텔의 주인이었나 보다. 점심으로 피시 앤 칩스와 햄버거를 맛있게 먹고 나가려는 우리에게, 두 손을 모아 와 줘서 고맙다며 공손하게 인사를 전했다. 이런 환대는 또 처음이라 뭉클했고.








태즈마니아에서의 일정이 막바지에 다다랐다. 운이 좋았는지 이 캠핑장에서는 맑은 날씨가 계속된다. 그런데도 매일의 빛과 그림자는 한순간도 같지 않다. 아니, 어제 본 그 풍경인데 오늘 이 순간 또 새롭게 아름답다. 선명하고 맑은데 파스텔톤으로 은은한 색감,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건네는 평화, 그 고요한 만남 사이 피어오르는 기쁨. 물질적인 것은 하나도 욕심나지 않는데 이 풍경만은 탐이 난다.



기억 속에 오래 보관할 수 있게 시간을 들여 바라보는 수밖에 없겠지. 내 방 창 앞에서도 마음을 열면 언제든 다시 꺼내 볼 수 있게. 투명한 호수와 파스텔톤의 하늘, 둥실 떠가는 하얗고 커다란 구름, 벽돌색 지붕의 집, 끝없이 푸르른 산줄기를 두 눈으로 거듭 따라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