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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May 29. 2023

헤맴과 우연에 더하기 하나

여행의 순간




이것을 놓쳐 손해만 보는 게 아니라 그 덕에 저걸 얻기도 하는 게 삶인가 보다. '모 아니면 도' 대신 모일 수도 있고 도일 수도 있는 그 사이, 이름 붙여 책정할 수 없는 다채로운 가능성과 유연하고 풍요로운 선택지의 숲을 오가며 살고 싶다. 누군가와 발맞추는 사이, 내 것을 덜어내는 찰나, 삶의 스펙트럼은 이상하게 넓어진다.



남편 출장 따라 갑작스레 도쿄로 여행을 다녀왔다. 딸아이 생일이 끼어 있어 아이가 좋아하는 캐릭터 상품을 구경하게 해주려 간 거였는데, 가장 열을 올리며 다닌 사람은 오히려 나였다.










일상에서도 걷길 좋아하는 나는 여행에서야 말로 걷는 게 최고라는 믿음을 고수하고 있다. 구글 맵이 최적 경로를 알려주고 택시를 타면 수고로움 없이 단번에 목적지에 닿을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떠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여행은 어떤 장소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우연을 경험하기 위해 떠나는 일 아닐까. 다 아는 일상에서는 불가능한 그런 우연들을. 길을 잃고 헤매느라 가고자 하는 곳에 도착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헤맴을 사랑하는 일이 내겐 여행이다.



이번 여행에서 우연히 걸었던 골목과 대학 교정, 강변이 기억에 남는 이유도 그 때문일 테다. 모르는 곳, 기대가 없는 장소이기에, 좋고 나쁨이나 기대치를 가늠하는 대신 순전하게 마음을 열게 되는 길. 우에노 공원에서 도쿄 예술 대학을 지나 아사쿠라 조각 박물관에 이르던 한적한 길, 요요기우에하라에서 도쿄 대학 고마바 캠퍼스를 지나 일본민예관까지, 그리고 민예관에서 다시 고마바토다이마에 역까지 걸었던 길, 다이칸야마에서 순전히 식당을 찾다 들른 구 아사쿠라가 주택이나 식사 후 천천히 걸어 내려간 길이 말도 안 되게 메구로 강변에 닿았던 일처럼. 아는 게 없어 비효율적으로 움직였을지 모르지만 목적성과 효율성, 생산성에서 벗어난 그 경로가 즐겁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다.











우연과 헤맴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한 사람은 바로 여덟 살 꼬맹이. 아이와 다니는 여행은 제약과 동시에 뜻밖의 발견과 즐거움을 만든다. 내 욕심껏 세운 일정으로 지친 아이가 여길 가보자, 저길 가보자 제안하면 지금껏 잘 따라와 준 것이 고마워 안 들어 줄 수 없었다. 목적지 따위 슥슥 지워버리고 아이 손 따라 멈추거나 뜻밖의 장소에 들어섰던 선택이 여행을 더 넉넉하고 풍요롭게 해주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여정은 일본 민예관에 들렀다 다이칸야마를 걷고 메구로 강에 닿았던 날. 여행 중반이라 피로감이 쌓였고 낮기온이 부쩍 올라 더위에 지치기도 했다. 그동안 타이밍을 못 맞춰 제대로된 저녁을 먹지 못했는데 그날은 어딜 더 가겠다는 마음을 덮고 가보고 싶었던 일식당으로 갔다. 맛난 음식에 배부르고 사케 한 잔 곁들이자 금세 기분은 달달해졌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다리는 뻐근한데 마음만은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막 해가 진 하늘빛은 왜 슬프면서 아름다운지, 서서히 땅거미가 내려앉는 길은 왜 그리 운치가 있던지. 마음의 창문을 모조리 열고 길을 걷는데 거짓말처럼 메구로 강이 나타났다.



메구로 강 주변으로 늘어선 벚나무들, 하얀 꽃은 다 떨구었지만 대신 초록의 잎사귀를 풍성하게 드리운 채 강물의 소리를 들으려는 듯 물 위로 한껏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서로의 속삭임을 들으려는 두 존재가 조화를 이루는 공간에서 그 소통에 동참하려는 듯 우리도 느슨하게 풀어졌고.  











딸아이는 다리 난간에 기대 검푸른 물을 내려다보았다. 흐른다기보단 물결치며 머무는 듯한 강물을. 그러다 나를 돌아보며 아이가 활짝 웃었는데, 그 표정이 내 것과 같다는 걸 알았다. 어떤 순간은 기적처럼 선명한 기쁨만 품고 우리에게 온다. 빛과 바람과 온도, 향기와 풍경. 그 모든 것이 생생하고 또렷하게 감각되면서.  



술을 마시면 시력이 더 좋아진다고 했던 한 작가의 말이 떠올랐다. 취미로 사진을 찍는 그녀는 술을 마시면 주위가 더 또렷하게 보인다며 신기하다고 했지. 그날 그녀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감각하는 세계가 그토록 맑고 환했다.














낮에 사두었던 옥수수 빵을 강가에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아 둘이 나누어 먹었다. 일식당에서 먹은 저녁 식사도 훌륭했지만 강가에서 한 입씩 번갈아 베어 먹던 옥수수빵만큼 맛있지 않았다. 이런 순간을 잘 기억해두고 싶었다. 걸음 하나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 바람 한 줄기에 휘청거리는, 벚나무와 강물에 마음이 포개지는. 삶이 대가 없이 건네는 아름다움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찰나를.



그런 순간이 언제고 찾아올 수 있음을 알기에, 버거운 일상도 견딜 수 있고 가슴 아픈 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닐까. 삶이란 긴 시간을 흐르며 이런저런 감정을 공평하게 나르는 나룻배일 테니까.



언젠가 딸아이가 나만 보면 눈을 흘기는 날이 올 것이다. 이름도 무서운 사춘기가… 그때가 오면 이날 강가에서 날 보고 환히 웃던 너의 얼굴을 꺼내 볼 거야. 언제든 우리가 다시 서로의 얼굴에서 서로를 읽는 날이 올 거라고. 메구로 강과 벚나무처럼 결코 닿을 수 없으면서도 서로를 들으려 몸을 기울이는 존재를 우리는 같이 목격했으니까.  



혼자 다녔다면 분주히 움직여 마음에 품었던 목적지를 다 들러볼 수 있었겠지만 멈춰 서 눈 앞의 풍경과 거리의 분위기에 한껏 젖어드는 경험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 것이 더 만족스러웠을지 저울질하는 건 무의미할 것 같다. 이미 ‘그때 참 좋았지!’ 라며 함께 떠올릴 수 있는 빛나는 순간을 얻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만의 여행은 그렇게 만들어 지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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