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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Jun 19. 2023

여름의 조각

하나의 문장, 하나의 장면



"모쪼록 당신의 초여름이 기대만큼 아름답기를 바라요. 사실 그건 마음에 달려 있는 문제랍니다."

-시집 서점 위트앤시니컬 주인, 유희경



알배추 한 알을 사다 반으로 자르고 소금, 후추, 올리브오일 살살 뿌려 프라이팬에 구웠다. 센 불로 앞 뒷면 색을 내고 뚜껑 덮어 속까지 익히고. 냉장고에 남아 있던 햄과 양파, 파는 잘게 채 썰어 알배추 익는 팬의 한 옆에서 볶아주고. 내 손에서 재료들이 다듬어지고 익어가는 잠잠한 과정이 좋다. 복잡하고 긴 삶에 간단하면서 투명하게 진실한 것도 있음을 알려줘서. 한 마디로 쉬운 요리가 좋다는 말.



구운 알배추 위에 볶은 햄 야채 올리니 근사한 요리가 되었다. 모양과 색이 예쁜데 맛도 좋았고. 햄 조각 위로 알배추 잎 덮어 먹으니 배추의 달큼함과 짠맛이 잘 어울렸다. 메밀국수에 알배추 구이로 충분했던 저녁. 밥이랑 반찬, 찌개를 챙기지 않아도 괜찮은 건 여름이라서. 여름이란 무언가를 덜어낼 수 있는 계절 아닐까.



몸에서 옷과 이불을 덜어내고, 괜스레 땀 흘릴 일 덜어내고, 얼굴 붉힐 일 피하면서 가능한 가벼워지고 싶은 계절. 삶에도 두께라는 게 있다면 얄팍해질수록 좋은 계절. 그렇게 생각하니 꽤 괜찮네, 여름이라는 계절, 응? 응응, 좋은 것 같아. 좋아진 것 같아 :)



해가 길어지면서 아이가 놀이터에서 노는 시간도 늘어났다. 5분만, 10분만 하는 아이를 달래 간신히 들어온 건 저녁 7시 반. 그래도 아이답게 건강하게 뛰노는 게 여름의 맛이지 싶고. 날마다 뛰며 새긴 웃음은 아이에게 무엇이 될까. 아이의 몸에는 어떤 무늬가 생길까.



샤워를 마치고 잠잘 준비를 하던 밤 ‘똑똑’ 현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니 승*와 민*(옆 동 사는 딸아이의 친구)가 잠옷 바람으로 그림책 한 권과 과자 한 상자를 들고 서 있다. 책을 빌려 주러 왔다면서. 우리 집이 1층이라 오가다 들러 먹을 걸 주고 가기도 하는데 형제는 오늘도 편의점을 다녀온 걸까. 잠잘 밤에 외출을 하고, 편의점에서 과자를 사고, 친구네 집 문 살살 두드려 이름을 부르는 일. 아이들에겐 이 모두가 간지러운 놀이일 테지.



명랑한 아이들이 어여뻐 나까지 마음이 들썩거렸다. 실내복 반바지를 배꼽 위로 끌어올려 입은 형제의 모습은 어찌나 귀엽던지. 받기만 할 수 없어 서둘러 그림책 한 권을 골라 건네주었다. 잠자리에서 잘 읽었으려나. 우리가 받은 책 <변기 아저씨>는 딸아이와 둘이서 배꼽 빠지게 웃으며 읽었는데.



노랗게 구워진 알배추, '서윤아' 부르는 친구들 목소리, 자갈 굴러가듯 경쾌한 아이들 소리로 들썩거리는 놀이터. 이런 순간이 영화의 스틸컷처럼 저장되고 있다. 노란 조명 아래 거듭 돌려보고 싶은 ‘나만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중. 문 앞에 서 있던 배바지 차림의 형제도 꼭 넣어야지. 아이들이 주고 간 ‘빠다코코넛’ 과자는 찰떡같은 소품.



여름 내내 얼마나 많은 조각이 우리에게 올까. 반딧불이처럼 반짝거릴 여름의 조각들. 엄마 심부름으로 커다란 수박을 가슴에 끌어안고 가던 밤, 고무줄 놀이 하느라 골목의 먼지를 뒤집어쓰고 놀던 저녁, 자전거를 타던 좁은 길, 땅따먹기 하던 울퉁불퉁한 시멘트 바닥까지……. 내게 남아 가슴을 따스하게 해주는 여름의 조각처럼 아이에게 남을 순간이.



얼그레이 차게 우려 레몬 한 조각, 얼음 두 조각 올려 자리에 앉았다. 창 밖으로 푸른빛 가득하고 적당히 차가운 홍차, 그리고 여름의 고요.



무럭무럭 여름이 자란다.

무럭무럭 여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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