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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Sep 29. 2023

기억 만들기

사랑이란



“엄마, 송편 만들고 싶어.”

아이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그래, 우리 송편 만들자.”



언젠가 어떤 책의 표지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랑이란 정성과 시간을 들이는 일의 다름 아니라고. 그 뒤로는 자주 이 문장을 떠올린다. 아이의 머리를 빗겨 주거나 샤워를 해주고 몸을 닦아 줄 때. 아침을 차리거나 무언가를 챙겨줄 때. 서둘러 마치느라 거칠어지지 않게 어루만지듯 속도를 늦춘다. 시간이 들고 번거로워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므로. 사소한 순간에 나를 기울이고 조금 더 세심해지자고, 사랑은 그런 것이라고 내게 속삭이면서.



어른이 되고는 송편을 만들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엄마와 만들어 본 것도 까마득한 옛 일이고. 만드는 법이야 인터넷에 나와 있을 테니 문제없겠지만 재료를 사고 반죽하고 모양을 빚어 찌려면……. 막상 하려니 귀찮은 마음이 앞섰다. 아이에게 만들자고 했지만 그냥 넘어갈까 하는 나를 그 문장이 돌려세웠다. 사랑이란 정성과 시간을 들이는 일의 다름 아니라고. 네게만은 정성과 시간을 들이고 싶으니까. 다른 속도로 마음을 쓴 자리에 사랑이 숨어 있음을 아이가 발견하면 좋겠다.



모처럼의 긴 연휴 딱히 할 일도 없는 우리 식구에겐 모여 앉아 시간 보내기 좋은 일이다. 텔레비전이나 보며 시간 죽이는 건 딱 질색이고 그렇다고 기름진 음식을 만들고 싶지는 않고. 아이가 있으니 명절 분위기만은 내고 싶었다. 오래간만에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동네 떡집에서 쌀가루를 사다 인터넷에서 찾은 대로 뜨거운 물을 넣어 섞었다. 내가 조금 치대다 남편에게 넘기고 통깨에 황설탕을 넣어 속을 준비했다. 마침 아시안 게임 하이라이트를 보던 남편이 눈은 텔레비전에 고정한 채 손으로는 반죽을 치댔다. 잠시 후 매끄럽게 한 덩어리로 반죽이 완성되었고 우리 셋은 거실 바닥에 모여 앉아 송편을 빚기 시작했다.



송편이 어떤 모양이었더라 아리송해하는 사이 처음 것은 만두처럼 넙데데하게 만들어졌다. 아이가 만든 것은 세모꼴이 되었고. "하하하하,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 다시 조물 조물 반죽을 어루만졌다. 한두 번 실패를 거듭하고는 의외로 남편이 아담하고 귀염지게 송편을 빚었다. 내가 큰 덩어리에서 일정한 양씩 잘게 잘라 동그랗게 굴려 주면 남편과 아이가 손바닥으로 납작하게 눌러 속을 넣고 반달 모양으로 마무리했다.



개수가 늘어갈수록 송편의 모양이 예뻐졌다. 볼록한 반달 모양으로 바뀐 송편을 쟁반에 가지런히 줄지어 담았다. 그걸 바라보는 것만으로 흐뭇했다. 의식하지 못했는데 송편에도 달이 들어 있구나. 궁금해서 찾아보니 ‘반달 송편’의 유래는 삼국 시대로 거슬러 간다고 한다. 당시에도 송편을 만들어 먹었는데, 처음 송편의 모양은 둥그런 보름달 모양이었단다.







하루는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잠에서 깨어 밖을 보니 도깨비불이 날아다니고 있었고 “백제는 곧 망한다! 백제는 곧 망한다!” 외치고는 땅 속으로 사라졌다. 그 자리를 파 보니 거북이가 한 마리 나왔고 등껍질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백제는 보름달이요, 신라는 반달이라.”


백제는 꽉 찬 보름달이라 저물 일만 남았지만 신라는 반달이라 점점 커질 일만 남았다고 점술가는 해석했고 그 자리에서 의자왕은 점술가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퍼지면서 신라 사람들은 반달 모양 송편을 빚어 먹으며 나라의 번창을 기원했고 점술가의 말처럼 백제는 멸망하고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다. 이어 후대 사람들도 반달 모양의 송편을 빚어 먹게 되었고. 추석에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비는 것처럼, 반달 모양의 송편에는 달이 차오르듯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송편을 만들자는 아이의 성화에 시작된 일이지만 막상 아이는 네댓 개 만들고는 힘들다며 손을 놓았다. 빨리 먹고 싶다는 말에 먼저 빚은 몇 개부터 쪄 보기로 했고. 처음 만들어 본 송편이 어떻게 나올지 나도 남편도 궁금했으니까. 찜기에 송편을 올리고 익기를 기다리는 사이에도 남편은 잠자코 앉아 텔레비전을 보며 송편을 빚었다.



냄비 뚜껑을 열자 뽀얀 김이 올라왔다. 면보를 살살 들추니 익어서 더욱 매끈해진 송편이 보였고. 반죽이 잘 되었는지 갈라진데 없이 더욱 둥글어진 송편들. 찬물에 넣어 식히고 서로 붙지 않게 참기름을 바르는 사이 고소한 향이 집안을 가득 채웠다. 한 입 베어 무니 쫀득쫀득 식감이 찰지다. 안에 넣은 깨가 많이 달지 않은데도 떡의 흰 살에서 말갛게 단맛이 스며 나왔다.



나와 남편이 송편 빚기를 마무리하는 사이에도 아이는 곁에 앉아 따끈한 송편을 주워 먹었다. 전기레인지 불 좀 꺼라, 찬물에서 송편을 건져라, 뭣 좀 가져와라 하면 아이가 쪼르륵 달려갔다. 그러고는 기어코 “나한테만 자꾸 뭘 시켜~” 하면서 투덜거렸지만. 텔레비전에 정신이 팔린 남편에겐 “어, 점점 모양이 이상해진다” 며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송편 몇 개 만드는 데 거실과 부엌이 난장판이 되었다. 안 쓰던 힘을 쓰고 익숙하지 않은 자세로 앉아 있느라 나중엔 무릎과 허리가 쑤셨고. 막상 다 만들고 나니 반찬통 세 개 분량 밖에 되지 않아 조금 허탈했다. 그런데도 거실을 채우던 투닥거림과 부산스러움, 오가던 말이 좋았다.



기대 이상으로 맛있는 송편, 맛있다며 잘도 먹는 아이. 참기름과 깨의 고소한 내음과 떡이 쪄지던 훈기 속 옅은 단내, 입 속에서 떡을 씹을 때 나던 찰진 소리까지. 거실에 세 개의 꼭짓점처럼 떨어져 앉은 우리가 보이지 않게 원을 그렸던 시간이다. 귀찮다면서도 매번 전 부칠 준비를 하고 거실에 커다란 프라이팬을 펼쳐 가족들 불러 모으던 엄마의 마음도 이랬을까. 수고롭지만 수고롭다고만 할 수 없는 이상한 즐거움, 번거로우면서도 같이 있는 것만으로 다행하고 고마운 마음까지.



송편을 빚으며 남편이 말했다. “어릴 적 할머니랑 송편 빚었던 게 생각난다. 진짜 어렸을 때인데, 그게 아직도 기억나네.” 언젠가 딸아이가 그런 말을 하지 않을까. 어릴 적 엄마 아빠랑 송편 빚은 일이 떠오른다고. 아빠가 처음 만든 송편은 만두 같았다고. 손으로 반죽을 조몰락거리던 느낌, 집 안에 진동하던 고소한 냄새가 생생하다고.








편안하게 즐거운 추석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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