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캠핑
사진 속 나와 아이는 거의 같은 옷을 입고 있다. 짐을 줄여야 해서 추리고 추려 옷을 싸 갔지만 그중에서도 절반 밖에 입지 않았다. 반 팔 티셔츠 위에 긴팔 티셔츠, 그 위에 청셔츠나 스웻셔츠, 그리고 패딩 조끼... 이런 식으로 겹쳐 입었다 하나씩 벗고 다시 입길 반복했지 새로운 조합으로 ‘옷을 갈아입는 일’은 드물었다. 그럴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날이 추워 땀 흘릴 일이 없었고 공기가 깨끗해 때가 덜 탔다. 설령 모래와 흙이 묻어도 그런 건 이미 텐트와 침낭 속에 뒤엉켜 있어 더러움의 축에 끼지 않았다. 이동 중 셀프 빨래방에 들러 빨래를 하는 날이 유일하게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있는 날. 옷에 대한 고민과 생각 하나를 덜자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잘 갖춰 입어야 괜찮은 사람으로 봐주는 사회적 시스템에서 벗어나자 옷은 그저 보온과 보호를 위한 장치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여행을 했던 적이 있다. 입고 간 청바지와 긴 팔 티셔츠 한 장, 긴 팔 셔츠 한 장으로 한 달을 보내는 여행. 대학교 졸업식에 불참하면서 선택한 나의 첫 번째 해외여행은 인도 북부를 횡단하는 여정이었다. 처음 뭄바이에 도착해 마주한 현실에 참담했다가도 서서히 그곳 환경에 적응하면서 어떤 해방감을 느꼈다.
서울에서라면 늘 신경쓰고 고민해야 하는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세상에 있으나 없기도 한 존재, 그 사회에 머물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거기 속하지 않는 존재였으니까. 이방인이 된다는 건 두렵고 고독한 일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용감하고 가뿐한 자의식을 마주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때 찍은 여행 사진에도 같은 옷을 입은 내가 있다. 초록과 민트 사이 녹색 계열의 브이넥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의 나. 그 모습으로 아침마다 짜이를 마시고 손으로 밥을 먹었고, 야간열차를 타고 거친 땅과 까만 어둠을 건넜다. 계급제도와 가난이라는 한계 속에서도 눈을 빛내며 웃던 사람들, 그럼에도 신에게 한탄하는 대신 헌신하던 겸허한 이들을 만났다. 인도 상인과 막판까지 흥정을 해내던 나는 낡은 초록색 티셔츠 하나로 당당했다.
날마다 같은 옷을 입었고 그 일이 내게 얼마나 편안했던지. 나를 치장하는 것에서 멀어질수록 내게 집중하던 시선이 외부로 건너갔다. 그럴수록 홀가분했다. 나의 등만 한 크기의 배낭 하나 매고 떠났던 오래전 인도 여행에서 삶의 진실을 일찌감치 배웠건만 어쩌다 그걸 까맣게 잊고 말았을까.
이상하게도 서울에서는 후줄근해 보였던 옷들이 여행지만 오면 빛을 발한다. 이 여행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 청남방은 사회생활 초년병 때 샀으니 이십 년 가까이 된 오래된 것. 더울 때는 햇빛 가리개용으로 추울 땐 바람막이용으로 휘뚜루마뚜루 걸칠 수 있어 얼마나 유용하던지. 한 달간의 캠핑 동안 호주의 너른 대지와 끝없는 대양의 빛과 냄새, 바람의 넘실거림을 온전히 받아들인 이 셔츠야 말로 이 여행의 진정한 기념품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이 남방은 미국 서부 여행 때도 함께 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찬란한 풍경이 새겨져 있는 옷. 이 옷이 지닌 푸른색이 나를 푸르른 곳으로 실어 보냈다. 마주했던 풍경을 인화지처럼 받아들였는지 오래도록 바래지도 않는다.
몇 해 입어 낡은 흰 티셔츠도 그렇다. 이번 여행에서 입고 버릴 마음으로 들고 왔는데 날마다 입으면서 이상한 애정이 자랐다. 흰 티 한 장이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낡을수록 제2의 피부처럼 내 몸에 감겼고 나를 자연스럽게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돌아가면 집에 있는 짐들을 대폭 줄여야겠다는 생각도 여행 중 자주 했다. 삶을 간소화시키는 것이 우리를 얼마나 평안하게 해 주는지 절실히 깨달았으니까. 옷장 가득한 옷과 창고에 꽉 찬 짐들은 문을 열 때마다 한숨부터 나오게 한다. 물건으로 채운 삶의 공허는 물건을 정리하고 치우는 노동으로 피로를 낳았고. 최소한의 것으로 한 달을 지내보니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건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다가왔다.
가지고 있는 것은 줄이고 가능한 소비하지 말아야겠다고 여러 번 생각했다. 실천이 쉽지 않겠지만 자주 생각하면서 삶의 방향을 옮겨 봐야지. 조금 불편하더라고 한 번 더 몸을 움직이는 선택을 해야겠다. ”지속 가능한 소비는 없다. 소비하지 않는 것만이 답이다.“ 환경 문제와 관련하여 우연히 접했던 이 문장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지속 가능한 소비, 더 나은 소비라는 말은 어쩌면 변명일 거라고.
넣을까 말까 고민하다 혹시나 하며 들고 간 스커트와 나시 원피스는 꺼내보지도 못했다. 오히려 설마 하고 넣어간 내복 한 장을 밤마다 감사히 입었네. 내복, 화이트 반팔 티셔츠, 긴팔 청셔츠. 언젠가는 이 차림의 나를 용감하고 멋졌다고 회상하는 날이 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