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라는 배움
4월이 되자 빛이 바뀌었다. 더 넓고 길어진 빛이 거실창으로 스민다. 꽉 닫아 두었던 창을 연다. 바깥의 소란을 집 안으로 초대한다. 땅과 공기, 빛과 향, 그리고 바람과 소음의 강도까지 미세하게 가벼워진 봄의 움직임을 안으로 한껏 들인다.
주말에는 기다란 미끄럼틀이 있는 공원으로 나들이를 갔다.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나무 위에 다글다글 피어난 살구꽃처럼 웃는 사람들 얼굴이 연둣빛 봄의 물결 사이로 둥둥 떠다녔다. 아이가 가고 싶어 했던 모래 놀이터에도 이미 아이들과 그 부모들로 벅적했고. 그 소란스러움은 축제날이기라도 한 듯 경쾌했다.
아이는 미끄럼틀을 타기 위해 남편과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미끄럼틀 아래에서 아이가 내려오길 기다리며 섰다. 그 사이 앞서 탄 아이들이 하나 둘 미끄러져 내려왔다. 저마다의 얼굴과 몸짓으로 환호하는 얼굴들. 그 작은 몸에 빈 틈 없이 들어 찬 신남과 즐거움이라니. 언젠가 가을에도 여기서 아이들 보며 감동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환희란 이런 거구나!', 생각했었지. 그러느라 내 마음도 덩달아 환희로 물들어 벅찼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때만큼 벅차지 않았다.
감정이 몇 년 사이 마모되었나 보다. 몸이 지닌 기쁨의 조리개가 예전만큼 활짝 열리지 않았다. 거의 변한 게 없다고 느껴지는데 일 이년 전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도 미세한 차이가 있다. 변화라기보다는 상실에 가깝다. 감각의 상실, 기쁨의 축소. 산다는 건 이별의 연속이구나. 이년 전, 일 년 전, 어제의 나와도 이렇게 작별하는 일. 시간은 지치지도 않고 꾸준히 무언가를 가지고 떠난다.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와도 조금 다를 것이다.
마음과 태도를 바꾸었다. 그러므로 오늘의 감각하기를 내일로 미루지 않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을 오늘의 내가 온전히 감각할 수 있게 나를 활짝 열자고. 소극적으로 미끄럼틀 아래 서 있던 자세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아이와의 놀이와 계절의 피어남으로 뛰어들었다. 아이와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 차례대로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왔다. 허공으로 몸을 던지듯 미끄럼틀 위로 몸을 밀어 던졌다. 두 손을 하늘 높이 들었다. 환호하는 또 한 명의 어린이가 되었다.
미끄럼틀을 타고는 모래밭으로 옮겨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이와 마주 앉아 누군가 버리고 간 플라스틱 컵으로 모래를 파고 담고 쏟았다. 물을 받아와 모래를 적시고 젖은 모래로 집을 짓고 케이크를 만들었다. 가능한 손에 모래가 묻지 않게 컵과 나뭇가지, 돌멩이로 요리조리 모래를 파헤치다 어느 순간 그것마저 내려놓았다. 두 손을 모래 안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손바닥으로 모래를 쓰다듬어 보았다. 동물의 털을 쓰다듬듯 이쪽저쪽으로 방향을 바꾸며 손으로 모래를 쓸었다. 손바닥에 쓸릴 때마다 작은 알갱이들 사이 숨어 있던 조금 더 큰 돌멩이들이 드러났고 각진 모서리들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희거나 노랗고, 검붉거나 푸르고, 초록빛이 감도는 알갱이들. (모래는 모래색이고 까칠까칠하다고 생각했지만) 모래는 모래색이 아니었다. 그 감촉이 거칠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모래 안에는 다양한 빛깔의 알갱이가 박혀 있고 손에 닿는 느낌은 차갑고 촉촉하면서 보드라웠다.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모래와 눈과 손으로 감각하는 모래 사이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는 기분. 이제야 모래를 제대로 보고 느꼈구나 싶어 비로소 모래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구나 아는 그 모래가 아닌 내가 경험하고 느낀 그 모래에 대해서. 모래는 어둡고 탁한 흙이 아니야. 모래는 빛으로 반짝이는 알갱이들의 집합체란다. 보석에 가까워. 그 알갱이들은 보드랍게 손바닥을 쓰다듬고 플라스틱 컵 안에서 찰랑거리는 소리를 내지. 모래는 바다의 감촉과 노래를 기억하는 거야.
모래를 재발견했다. 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사이 모래는 새롭게 태어났다. 어떤 대상에 대해 제대로 보고 듣고 감각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받아들이고 희미한 상태로 내 안에 굳혀버린 이미지는 얼마나 많을까. 무언가를 지칭하는 단어를 우리는 얼만큼 알고 사용하고 있을까. 잘 쓰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잘 아는 게 먼저인데. 새로운 기기를 사용하기 위해 ‘사용설명서’부터 읽고 찬찬히 살펴보듯이. 잘 알기 위해서는 대상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경험하는 게 먼저다. 그렇게 이해를 쌓아가는 것이 배움일 것이다.
그렇다면 긴 시간 학교를 다니며 배운 많은 것들에 대해 배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엇을 왜 배우는지도 모른 채, 해야 한다는 당위로 받아들이는데 급급했던 지식을 진정한 배움이라 할 수 있을까. 어떤 배움이 진짜인지도 모른 채 그저 따르고 익히는 데 급급했다. 꼼꼼하게 살피고 스스로 의미를 재정립한 후 사용할 줄 알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거친 배움은 드물지 않았을까. 글을 쓰면서 언어사용법을 다시 배운다. 내가 아는 단어와 그 대상을 처음인양 골똘히 바라보고 샅샅이 뜯어본다. 스쳐가는 대신 파고들어 본다.
모래 놀이를 하고 기다란 미끄럼틀을 다시 탔다. 이번에도 밑에서 아이를 기다리는 대신 아이와 나란히 줄을 섰다 미끄러져 내려왔다. 미끄럼틀 꼭대기에 달린 봉을 잡고 힘껏 몸을 밀어내면 몸은 속도를 입고 빠르게 하강한다. 그러면 날아오를 것처럼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미끄러짐은 날아오름이 되었다. 해방이었다.
어떠해야 한다거나 무얼 해야 한다는 식의 구속이나 억압, 부담에서 해방되었다. 멈춤에서 벗어나 정적인 것에서 탈출하면서 움직임과 환호성이라는 혼돈으로 뛰어들었다. 피하고자 했던 것으로 몸을 던지자 그것이 해방임을 감각할 수 있었다. 현실에서 현실을 벗어나는 가장 손쉬운 방법, 놀이. 놀이는 해방이다. 금세 아이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더위와 빛, 그리고 해방의 기쁨으로 달구어졌다.
열심히 놀고 나니 온몸이 노곤하더니 잠자리에 누웠을 때엔 몸살이라도 난 듯 뻐근했다. 그처럼 마음도 뻐근했다. 몸과 마음은 이렇게 맞닿는다. 잘 놀아서 뿌듯하게 뻐근한 몸과 마음. 잘 노는 일은 몸과 마음을 연결하고 온전하게 감각하는 일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