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쓰기 위한 팁
왜 글을 쓰느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내가 세계에 존재하며 느끼는 이 깊은 편안함/불편함, 그리고 전념이라는 선택지와 관련 있을 터다. 내가 온종일 가만히 앉아 베끼기만 한다면 그것이 내게 주어진 최선의 선택지일 것이다. 그건 항우울제도 아니고, 그렇게 짜릿한 일도 아니고, 유산소 운동도 아닌, 그저 일종의 주문을 읊는 행위인데, 나는 종교적인 이유로 그 일을 하고 또 한다. 그러니까 그게 내 기본자세라는 뜻이다.
46쪽 <낭비와 베끼기> 아일린 마일스, 송섬별 옮김, 디플롯
집에 돌아왔다.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홀로 책상 앞에 앉아 흰 종이 위에 글을 적어나가는 시간, 나의 작은 아침을.
아일린 마일스는 글쓰기를 '낭비와 베끼기'라고 표현했다. 작가가 되려면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시간을 굴릴 줄 알아야 한다면서. 그는 시인이었기 때문에 기꺼이 시간을 낭비하며 살았고, 시간은 그 자체로 상이자 성취였다고 말한다. 그에게 문학은 낭비이자 베끼기이다.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트리를 베껴 그리며 몰입했던 순간 이후, 그는 베끼는 일이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혀주고 세상과 관계 맺게 해 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걸 원했다. '베껴야 한다고 명령하는 감각'이 언제나 그 자신을 온통 채웠다.
아일린 마일스는 세상을 베껴 적는 일에 시간을 낭비했다. 자신을 겨냥하고 선택한 그 일, 낭비하고 베끼는 일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믿었고 그 일을 하는 것이 삶이라고 당당히 말했다.
내게도 글쓰기는 세계를 베껴 적는 일이다. 요철이 있는 돌비석 위에 종이를 올려 문지르면 표면에 닿은 종이로 돌의 무늬가 옮겨 가듯, 세계와 만나는 사이 세계가 내게 남긴 흔적을 종이로 떠내는 작업. 그 일은 ‘나의 작은 아침(실제 시간)’에 머물며 ‘나의 작은 아침(노트북 폴더명)’을 쓰며 이루어진다. 전자는 삶에 실존하는 시공간이고 후자는 가상의 공간. '나의 작은 아침'에서 시간을 향유한다. 시간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아낌없이 써야 하므로 이는 낭비와 유사하다. 시간을 사용하는 만큼 글자가 쓰여 종이가 채워진다.
그것은 고독의 또다른 이름이다. 글을 쓰려면 자발적으로 고독 안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아무리 좋은 종이와 펜, 또는 사양 높은 노트북이 있더라도, 탁월한 글감과 약간의 재능이 있더라도 홀로 글쓰기에 빠져들 시간과 장소를 마련할 수 없다면 글을 써낼 수 없다. 글을 쓰게 하는 건 재능보다 노력, 순간의 영감보다 반복이라는 기술이라고 작가들은 말한다. 설령 그걸 지니고 있더라도 혼자라는 물리적 시공간을 만들지 못하면 글쓰기를 시도할 수 없다. 글을 쓰고 싶은 당신이 가장 먼저 갖춰야 하는 건 고독이다. 고독을 기본자세로 받아들이고 고독이라는 시공간을 스스로에게 지어줘야 한다.
도쿄로 며칠간 여행을 다녀왔다. 남편 직장 때문에 도쿄에 머무는 친구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낯선 곳에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친구를 격려하는 게 여행의 목적이어서 계획도 없이 떠났다.
목적과 계획이 없더라도, 여행은 우리를 새롭게 한다. 평소에 알 수 없었던 나와 잊고 지냈던 자신을 만나게 해 준다. 낯선 길을 걷는 사이 내 안에서는 사라졌던 호기심이 되살아났다. 호기심을 등불 삼아 세상을 탐험했다. 이토록 열심히 걸어 다닐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국경을 건너자 다 안다며 시큰둥해하던 표정과 피곤해 질까 봐 시도하길 망설이던 태도가 사라졌다. 배우려는 사람의 눈과 씩씩한 걸음이 찾아왔다. 모르는 세상을 향해 나를 열고 부딪혀 보겠다며 용기 내는 나를 낯선 곳에서 반갑게 재회했다. 그래서일까, 세상도 나를 환대했다.
그런데도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다. 외부로부터 충만한 영감과 자극을 받는데 글로 충분히 옮겨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글을 쓰려면 혼자 있을 시간과 장소가 필요한데 친구의 가족과 함께 머무는 생활에서 그런 여건을 마련하기가 어려웠다. 엄청난 양의 정보가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아름다운 장면 앞에서 선물 받은 사람처럼 환해졌지만, 내면의 한 편에는 아슬한 불안함이 자랐다. 이 모두를 제대로 소화하고 있을까, 잘 기억할 수 있을까. 쓰지 않으니 휘발되지는 않을지, 쓰지 않는 시간만큼 쓸 수 없게 되는 건 아닐지 하는 걱정이 따라다녔다.
핸드폰 메모장과 일기장에 수시로 짧은 기록을 남겼다. 시간과 여건이 허용될 때 짧게나마 글을 쓰며 불안을 잠재웠다. 삶에서는 눈앞의 순간을 겪고 살아내는 게 우선이니까. 의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몸에서 여행의 경험을 흡수하고 있을 거라고 나를 다독였다. 몸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기억하고 기록을 남기기도 한다. 기억에는 다양한 감각이 사용되고 피부에서도 나무의 껍질이나 나이테처럼 바람과 빛, 주변의 소리와 공기의 결을 무늬로 새긴다. 우리의 영혼은 탁본을 뜨듯 삶의 순간을 베끼고 찍어내 무의식의 어딘가에 부지런히 저장한다.
여행한 날수가 쌓일수록 집으로 돌아가 책상 앞에 앉을 시간이 기다려졌다. 그날의 기억, 만남, 기쁨과 당혹스러움, 놀라움과 반가움, 흔들림과 반짝임을 나만의 방식으로 베껴내고 싶었다. 도쿄 체류 기간의 마지막 날 본 야마모토 요코(b.1952~)의 전시에서 그 갈망이 더 짙어졌다.
전시실의 동영상에서 작가의 삶과 작업 과정을 보았는데 작가의 아침 일과도 등장했다. 작업에 앞서 음악을 틀고 머리를 묶고 앞치마를 매는 작가. 작업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의식 같았다. 그리고는 도구가 준비된 책상에 앉아 참고 자료를 들춰 보다 이내 신중하게 그림을 그리는 작업으로 들어갔다. 그걸 보는 사이 ‘내가 바라는 삶이 저런 거지!’라는 명백한 말이 내 안에서 떠올랐다. 매일 일정 시간 내가 통과한 세계를 홀로 고요히 옮겨내기, 그런 일에 몰두하며 살고 싶다고.
작가는 그런 생활을 매일 반복했을 것이다. 시간이 쌓여 그만의 섬세한 선과 맑은 색을 입은 그림들이 만들어졌다. 어떤 날은 작업이 잘 풀리지 않고 시간을 쏟아부어도 결과물은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책상 앞에 앉았을 것이다. 그리고 또 그리고, 또 그리고. 돌파하기 위해 끝없이 작업과 대면했을 것이다.
야마모토 요코는 동판화(에칭)를 전문으로 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현대 판화가이다. 정교한 기술과 섬세한 표현력으로 주목받은 그는 특유의 서정성과 시적 상상력이 담긴 작품을 선보인다. 동판화 특유의 가느다란 선과 정밀한 디테일에 은은한 색채와 부드러운 톤이 보는 이에게 따스한 울림을 전한다. 현실과 꿈, 일상과 환상을 넘나들며 인간의 감정과 기억, 자연을 정교하게 다룬 작품에 그만의 성찰과 감성, 상상력이 덧대어져 풍부한 감정과 서정성이 넘실거린다.
야마모토 요코의 섬세한 선과 맑고 선명하지만 한없이 부드러운 색감을 지닌 작품을 바라보던 시간이 내 안에 일종의 요철을 만들었다. 그의 그림이 내게 무언가를 내주던 순간, 따스하면서도 애틋한 감정이 수채화 물감처럼 내 안을 물들였다. 나도 그걸 사용해 무언가를 적고 싶었다. 작가가 마음을 기울여 무언가를 그려내는 과정이 사랑이듯, 내 안에 일렁이는 감정, 사랑과 유사한 감정을 마음껏 글로 옮겨내고 싶었다.
쓰기와 그리기, 그리기와 쓰기, 베끼고 베끼고 베끼기. 신이여. 신이란 이런 반복에서 발생하는 그 무엇이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말이다. 나는 그것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 그 언어를 사랑해야 한다. 그게 내가 세계와, 또 신과 맺은 계약이다. 신이여.
55쪽 <낭비와 베끼기>
이유나 설명 없이 그저 하는 일. 나를 통과한 감정과 경험을 글로 옮기는 일. 세상을 베끼는 일. 글쓰기는 내게 주어진 최선의 선택지이자, 가장 갖고 싶은 도구다. 그건 항우울제도 아니고, 그렇게 짜릿한 일도 아니다. 유산소 운동도 아닌, 그저 일종의 명상이나 혼잣말 같은 행위인데, 나는 습관처럼 그 일을 하고 또 한다. 그게 나의 기본자세다. 쓰고 베끼기, 쓰고 베끼고 베끼기. 아일린 마일스는 이런 반복에서 발생하는 무엇을 '신'이라 했고 나는 그걸 '잔잔한 마음'이라 부른다.
여행은 끝났고 즐거운 기운과 다시 해보자는 용기, 그리고 일정량의 피로와 함께 돌아왔다. 나흘간 몸에 닿았던 세계의 흔적이 피부에 남았다. 이제부터 그 흔적을 ‘나의 작은 아침’에 옮겨 봐야지. 몸으로 하는 여행이 첫번째였다면 두번째는 손으로 떠나는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