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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명상이자 탐험

계속 쓰기 위한 팁

by 춤추는바람



“언니, 글쓰기가 명상 같아요. “


요즘 글쓰기로 버틴다는 선배 언니에게 내가 한 말이다.


언니는 올해 초에 시작한 글쓰기를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언니에겐 고1 남자아이와 중1 여자 아이 둘이 있는데 학업에 스트레스를 받는 첫째와 자기주장이 강해지면서 가시 돋친 말을 내뱉는 둘째를 대하느라 힘겹다고 했다. 거기다 갱년기 증상으로 잠을 충분히 잘 수 없는 상황이 더해져 신경이 예민한 상태다. 그런데도 글쓰기 덕에 사춘기 아이들과의 갈등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어딘가 속마음을 털어놓고 자신을 돌보는 일이 필요한데 글쓰기가 그런 창구가 되어 주어 다행스럽고 감사하다고. 그 말에 크게 공감했다. 나도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시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쓰기에 기대 마음 수련이라는 걸 해왔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시끄러운 말을 빈 종이 위에 쏟아내고 나면 해결책이나 결론을 얻지 못하더라도 속이 정돈된 기분이다. 비워낸 만큼 내 안의 거칠던 파도가 잔잔해진다. 때로는 글로 적었다는 행위만으로 위안을 얻는다. 명상을 통해 생각을 지워 내면의 평온을 마련하듯 글쓰기도 유사한 역할을 한다. 글로 내 안의 생각을 덜어낸다. 종이 위로 흘려버린 생각은 글자라는 형태를 갖춰 보기 흉하지 않다. 누구를 헤치거나 소란을 피우지도 않는다. 글쓰기는 자신과 타인, 세계와 소통과 화해를 시도하는 가장 고요하고 평화로운 방법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나 자신에 대해 배우려고 노력한 결과, 글을 쓰지 않으면 내 상태가 좋을 리 없다는 건 안다. 글을 쓰고 있지 않을 때면 주변 세계가 서서히 빛을 잃는다. 감각이 무뎌지고, 남편을 퉁명스럽게 대하고, 아이들에게 성질을 내고, 창밖으로 불타는 단풍나무나 현관진입로를 건너가는 거위 가족에 주목하는 대신 집에서 사소하게 잘못된 부분들(천장에 금이 갔다거나, 계단 벽을 따라 얼룩이 졌다거나)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글을 쓰지 않는 나의 심장은 무겁게 가라앉아 굳어진다.”
<계속 쓰기> 대니 샤피로



이제는 글을 쓰지 않으면 내 상태가 좋을 리가 없다는 걸 안다. 글을 쓰고 있지 않을 때면 주변 세계가 서서히 빛을 잃는다. 감각이 무뎌지고 남편을 퉁명스럽게 대하고, 아이에게 성질을 낸다. 가벼운 바람에도 춤추듯 잎사귀를 흔드는 창밖의 나무나 벽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빛의 흔적에 주목하는 대신 집에서 사소하게 잘못된 부분들(화장실 바닥에 낀 물 때나 어지럽혀진 아이 방)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글을 쓰지 않는 나의 심장은 무겁게 가라앉거나 얼음처럼 차가워진다.


글을 쓰면 짧은 시간이라도 삶을 예민하게 감각할 수 있다. 지나간 시간이더라도 글로 옮기는 동안 세밀하게 들여다보며 다시금 충만하게 감각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에는 손 근육만 사용하지 않는다. 마음 근육도 활발하게 움직인다. 글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심장의 피를 글자로 흘려보내듯 마음을 기울인다. 글쓰기라는 활동은 심장을 가볍고 말랑한 상태로 만들어주는 마사지 같다.


글을 쓰기 위한 몰입으로 나를 괴롭히는 생각을 잘라낸다. 한 편의 글을 쓰는 사이 나를 사로잡았던 질문이나 생각을 종이 위로 비워낸다. 명상으로 내면을 바라보며 불필요한 일과 생각에서 놓여나듯 공들여 써 내려가는 문장으로 내 안에 부대끼는 생각을 지워낸다. 하나의 글을 쓰고 나면 내면을 정돈한 듯 개운하다. 내게 상냥함이 돌아오고 삶의 우선순위가 명료해진다. 새로운 피를 수혈받은 듯 삶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생생한 감각을 회복한다.




글쓰기 모임이 있어 일로 바쁜 와중에 글 한 편을 썼다. 주제는 '감정'이었고 최근 나를 사로잡은 우울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 보았다. 명상을 하듯 복잡한 마음을 빈 종이 위에 풀어 내자 우울의 원인이 풀려 나왔다. 나이 듦, 살아보지 않은 미래, 불안 같은 단어들이 등장했다. 어느 정도 수용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이 듦'이 여전히 나를 우울하게 하는구나. 그걸 인정하는 것으로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해마다 나이 들어가는 일은 처음이라 매해 생소하게 감각한다. 다 아는 척 쿨하게 대하지 말고 매번 화들짝 놀라며 제대로 겪는 게 맞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은 닥치지 않은 문제다. 불필요한 걱정을 앞서하느라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 걱정을 단숨에 지울 수 있는 사람도 나 자신이라는 게 명확해졌다. 자연스럽게 현재, 바로 지금으로 초점을 조정해 보았다. 다가오지 않은 걱정을 지울 수 있는 손쉬운 방법으로 내가 아는 기쁨을 떠올렸다. 커다란 나무와 보송보송한 니트로 연결되었다. 나이 들수록 그늘이 넓어지는 나무, 성기게 짜일수록 보드랍고 유연해지는 니트. 나이 듦과 엉성함, 나무와 니트가 지닌 속성은 두 대상을 떠올릴 때 나를 따스하게 감싸주는 힘이다. 하지만 그 속성을 내게 대입하면 두려움이 앞선다. 나이 들면서 기력을 잃고 매사 엉성해질까 두렵다.


자신에게 닥친 나이 듦과 엉성함은 두려워하면서 나무와 니트가 지닌 속성은 선망한다니, 참 모순적이다. 그래, 사람이란 모순적이고 복잡한 존재지. 그런데도 두려워하는 지점에서 동경이 자란다는 발견이 신선했다. 내가 두려워하는 또 다른 것에는 무엇이 있지? 거기에 내가 지향하는 바가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우울을 파고들었더니 기쁨에 닿아 나무와 니트로 연결되었다. 우울이라는 구름을 거둬낼 단어도 결국 내 안에서 끄집어낼 수 있었다. 나무와 니트는 두려움과 동경이 동전의 앞뒷면 같은 거라고 한다. 어떤 단어들은 삶의 메타포다. 가만히 만지작거리면 온기가 도는 손 안의 돌멩이처럼 어떤 단어를 내 안에 품으면 단어에도 생명이 깃든다. 삶을 이끄는 은유가 자란다. 두렵지만, 나무처럼 나이 들고 니트처럼 성글어지고 싶다. 모두의 내면에도 그런 단어가 숨어 있을 것이다. 두려움이자 동경, 절망이자 희망인 단어가. 우리 안의 알 수 없는 동굴, 거기에 단어들이 산다. 단어들을 만나려면 그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글쓰기란 등불을 들고 사물을 밝히며 어두운 방을 걷는 일이라고 버지니아 울프는 말했다. 글쓰기란 내면의 어두운 방으로 희미한 등불을 들고 끝없이 걸어 들어가는 일, 미지로 향하는 탐험이다. 그곳에서 무엇을 만나게 될지 써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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