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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을 사랑하기

계속 쓰기 위한 팁

by 춤추는바람


글은 손이 아니라 몸으로 쓰는 일이다. 글도 몸으로 밀고 나가야 완성할 수 있다고 글 하나를 송고한 뒤 생각했다.


글 쓰는 동안 때로 흰 종이는 높은 벽이 된다. 어딘가 막혀 다음 문장이 떠오르지 않을 때,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결론을 내릴 수 없을 때, 마감이 임박했을 때 그렇다. 그런 순간 글을 잇기 위해서는 벽 앞에 버티고 서야 한다. 도망치고 싶을수록 무시무시한 종이 벽을 밀고 나가는 힘이 필요하다. 글이 막히면 발바닥에 힘을 주어 보거나, 엉덩이를 의자 안으로 바짝 밀어 넣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본다. 크게 숨을 쉬어 몸 안에 흐름을 만든다. 몸의 힘을 느끼며 글을 밀고 나가기 위해서다.


가만히 앉아 흰 종이를 채우는 건 버티기와 유사해 보이지만 한 자리에 머무는 일만은 아니다. 글이 끝나면 내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머리를 굴리고 손을 움직이는 사이 생각이 자라거나 바뀌어 내가 달라진다. 아주 작고 보잘것없더라도 무언가는 변한다. 없던 글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커다란 변화다. 나의 변화란 세상에 찍히는 내 좌표가 미세하게 움직였다는 의미. 글이 적히는 만큼 나는 이동하는지 모른다. 글을 통해 새로운 문을 그리면 그 문을 열어 나를 옮길 수 있다.


종이를 밀고 나아가기. 그 힘은 마감 앞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마감은 도망가려는 나를 책상 앞에 앉히고 글이 끝날 때까지 붙들어 놓는다. 흰 종이를 글자로 채운 뒤 여러 번 읽어 문장을 다듬고 문단을 배열한다. 형상을 빚는 조각가처럼 세부 요소를 치밀하게 깎아내고, 흙덩이를 이곳저곳으로 옮겨 붙이듯. 힘겹게 써낸 문장과 문단을 통으로 잘라내기도 한다. 충분히 양감을 만든 뒤 깎아내는 조각가처럼 일단 쓴 뒤 많은 분량을 덜어내는 편이다. 지운 글도 쓴 거라 생각한다는 한 시인의 말을 들은 뒤로는 삭제하는 문장이 아깝지 않다.


마감 앞에서는 매번 상반된 마음이 동시에 떠오른다. 못 할 것 같다는 두려움과 어떻게든 해낼 거라는 확신. 도저히 못 쓰겠다 싶은데도 마감을 했던 경험이 남긴 기묘한 감각이다. 못하겠다는 두려움이 커질수록 끝이 있다는 믿음도 불어난다. 여기서 조금만 더 밀고 나가면 끝에 닿을 거라는 믿음. 그 믿음으로 종이 앞에서 버틴다. 그러니 흰 종이뿐만 아니라 모순된 마음도 온몸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


글쓰기는 두려움이라는 거대한 돌덩이를 굴려 쓸 수 있다는 확신으로 뒤집어 놓기다. 시시포스의 돌처럼 한참을 굴려 가까스로 확신으로 돌아갔다 일순간 다시 두려움으로 뒤집혀 내 앞으로 굴러 떨어진다. 그렇기에 마감 앞에서의 글쓰기는 매번 처음처럼 두렵다. 못 할 것 같은 두려움에서 시작한다. 힘겹게 두려움을 밀고 가다 원고를 끝내면, 잠시 쓸 수 있다는 확신에 닿는다. ‘끝’이라는 기쁨은 찰나에만 존재한다.


어떤 글은 마감 앞에서만 써진다. 모든 글쓰기가 두려움을 몰고 오지는 않지만 원고료를 받거나 불특정 다수에게 글이 노출되는 게 확정적일 때 두려움은 커진다. 글을 읽을 독자들은 내게 호의적일 이유가 없고 특정 목적이나 이익을 바라 글을 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끝까지 글에 붙잡아 두려면 기본 이상은 갖추어야 하고 적어도 하나는 건져갈 만한 것을 대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글을 쓰는 과정과 다 쓴 뒤에도 끊임없이 질문한다. 나라는 익숙한 시선에서 벗어나 한 발 물러서 글을 점검한다. ‘누구든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인가?’, ‘하고자 하는 말은 명료한가?’, ‘그걸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가?’, ‘그럼에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러다 보면 적당히가 안 된다. 쓰고, 고쳐 쓰고, 다시 쓰고. 그런 뒤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그런데도 마감을 사랑한다. 마감은 나를 명료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 글을 반드시 마쳐야 할 운명이라고 명확한 정체성을 부여해 준다. 덕분에 수시로 흩어지려는 정신과 집중을 방해하는 잡다한 일로부터 철벽을 세울 수 있다. 마감이라는 철벽, 그 앞에서만 주어지는 온전한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껏 생각할 수 있는 자유와 나의 에너지를 온통 글쓰기에 쏟아부을 수 있는 자유다. 그때 온몸으로 간신히 밀고 나가야만 하는 그 벽은 오히려 반가운 것이 된다.


하나의 글을 완료하는 것만이 지상최대 임무가 되는 순간 삶은 단순 명쾌해진다. 인간은 자기가 하기로 한 일-결코 버릴 수 없는 것-에 확실히 묶이고, 지키기로 한 것을 지키면서 자유로워진다*고 한 정혜윤 작가의 말처럼. 마감 앞에서 나는 아이의 부름과 끼니 챙기기에 적당히 눈을 감는다. 핸드폰의 요란한 울림도 무시할 수 있는 초연함이 생긴다. 동이 트면 홀로 배를 끌고 망망대해로 나가 온종일 떠 있다 돌아오는 나이 든 어부처럼 언어의 바다로 나만의 종이배를 타고 나아간다. 작고 초라하지만 내겐 더없이 안락한 배. 배 안에서 보내는 시간은 하나의 사투이자 사치이다.


이번 마감은 다음 마감으로 건너가기 위한 징검돌이 된다. 마감을 지키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글을 마치는 순간 두려움은 사라지고 찰나의 기쁨과 함께 다음 마감도 이처럼 해낼 거라는 안도가 찾아온다. 이번을 건넜으니 다음도 건널 수 있다는 믿음을 다져 내 앞에 놓는다. 마감과 마감 사이 건너뛸 수 없을 만큼 먼 거리에 돌 하나를 보탠 셈. 하나의 마감을 끝낸 순간 나는 이미 다음 마감을 향해 선다. 잠시 다음 마감을 기대하는 여유도 누린다. 이번보단 낫겠지, 이번보단 수월하겠지, 하며 머지않아 깨질 허약한 꿈에 부푼다. 곧 무너질 테지만 그 꿈이 다음 글을 쓰게 한다. 만약 당신이 계속 쓰는 게 어렵다면 강제 마감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마감을 통과하며 겪은 숨 막힐 듯한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후련한 잠깐, 바로 지금이다.






*<슬픈 세상의 기쁜 말> 정혜윤, 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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