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쓰기 위한 팁
“다른 어떤 보상 없이도 ‘그냥’ 그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 있다. 신기한 것은 그 일을 제대로 해냈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변한다는 점이다. 혼자 쓰기, 혼자 읽기, 제대로 말하기가 모두 이 신기한 일에 속한다.”
정혜윤 <슬픈 세상의 기쁜 말>, 위고
아침에 글 한 편을 쓰고 나면 뿌듯합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다 한 사람처럼 후련합니다. 가장 중요한 일을 마쳤으니 나머지 일도 무사히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렇습니다, 저라는 사람은 글을 써야 즐거워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계속 쓰고, 쓸 수밖에 없습니다. 글을 쓰고 나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 생긴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요. 쓰는 동안은 힘들지라도 쓰고 나면 즐거워진다는 걸 아니까 쓸 수밖에요. 글쓰기가 제겐 의미 있는 일이고 그 일을 해냈다는 데서 성취감을 얻습니다. 보상 없이도 그냥 그 일을 했다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글친구들과 온라인으로 모임이 있던 때의 일입니다. 당시 글감은 ‘사랑’이었어요. 정치적 이슈로 내외적으로 침체된 분위기가 지속되던 때라 ‘사랑’으로 글을 쓰려니 막막함부터 닥쳤습니다. 좋은 글일수록 먼 데서 시작해 눈앞으로 가져와 보여준다는데 저는 먼 곳을 떠올리면 아무것도 쓸 수 없는 기분이 들고는 합니다. 그러니 생각을 멀리 던져 보았다가도 수확 없이 눈앞으로 돌아오고 맙니다. 나의 생활과 주변의 일, 최근의 경험에서 시작해 봅니다. 추상적인 사랑의 의미를 고민하는 대신 구체적으로 사랑을 느꼈던 순간을 떠올립니다. 언제였더라, 무얼 보고 그런 감정을 느꼈더라, 질문하면서요. 그렇게 가볍게 시작하면 의외로 글이 풀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번엔 이 방법도 효과가 없었어요. 작은 것으로 시작은 했는데 앞으로 죽죽 나아가질 못했어요. 계속 머뭇거렸지요. 열쇠 구멍을 찾지 못한 사람처럼 화면에서 깜빡이는 커서만 바라보고 있었지요. 그러느라 하릴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앉기를 반복했어요. 글쓰기에 중요한 것은 글 속으로 뛰어드는 일입니다. 푹 빠져서 한동안 나오지 않아야 해요. 글이라는 물이 흘러나와 그 안에 제가 잠길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야 합니다. 발목에서 무릎으로, 허리에서 가슴팍까지 차오를 때까지 종이 앞에 자신을 묶어 둬야 합니다. 시간이 흐른다는 감각도 잊어버릴 만큼 흠뻑 젖은 상태로 시간을 보내야 글이 완성됩니다. 흘러넘치도록 받아 적어야 마침표라도 찍을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엉성하게나마 초고를 끝내야, 퇴고할 만한 글의 뼈대가 생깁니다.
그날은 종이 앞에 저를 묶어 두는 게 어려웠어요. 지루하게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다 어느새 시간이 흐른다는 감각조차 잊혀야 하는데 그 지점까지 저를 종이 앞에 고정시켜 두지 못했던 거죠. 그럴 때 제가 쓰는 특단의 조치는 스위츠를 먹는 거예요. 부끄럽지만, 젤리나 초콜릿 같은 단 것을 먹어요. 그런 순간을 위해 평소에 초콜릿이나 모양이 예쁜 젤리, 좋아하는 쿠키를 아껴 둡니다.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 스스로에게 힘을 내라는 듯 아껴 두었던 스위츠를 꺼내 주는 거예요. '특별히 이걸 줄게. 달콤한 걸 먹고 힘을 좀 내어 보자.' 그렇게 스스로를 격려해 줘요. 혼자 글과 씨름하는 제게 초콜릿은 때로 가장 든든하면서도 다정한 친구가 되어주어요. 달콤한 걸 먹고 나면 제 안의 인내심이나 내구력 같은 게 한 뼘 채워집니다.
이런 때를 위해 아껴 두었던 마카다미아 초콜릿 한 상자가 있었어요. 그걸 먹으면서 한 문장, 한 문장 적어 나갔습니다. 그걸 다 먹은 후에는 이제야 준비를 마쳤다는 듯 종이 앞에 붙들릴 수 있었습니다. 종이 앞에 붙들리면 문장이 문장을 부릅니다. 한 문장을 적으면 그 문장이 다음 문장을 마중합니다.
그럴 때엔 머리가 아니라 손에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머리에서 생각을 굴려 손이 글로 옮기는 게 아니라 손이 움직일 때마다 생각이 풀려 나와요. 손가락 끝에서 생각이 자라지요. 마치 글에 올라탄 것 같았습니다. 신유진 작가는 글자에 올라타게 하는 독서가 있다고 말했어요. 어떤 책은 글자를 따라 읽고 어떤 책은 글자에 끌려가는데, 특정 작가의 책은 올라타게 된다고 표현했지요. 올라탄다는 말, 멋지지 않나요. 글자에 올라타 달려가는 독서라니. 다들 흠뻑 빠져들어 이야기와 한 몸이 되어 흘러갔던 독서의 경험이 있지 않은가요?
글쓰기도 올라타는 글쓰기가 있습니다. 머리에서 손으로 생각이 흐르는 간격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손가락이 빠르게 문장을 쏟아내는 글쓰기요. 그렇게 문장을 적어 나갈 때엔 글에 올라탄 기분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그 상태가 되면 분량을 채우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손끝에서 쏟아져 나오는 문장을 빠르게 받아 적으면 A4 3~4장은 금세 채워집니다. 물론 그렇게 쓴 글이 좋은 글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건 단지 초고일 뿐, 거기서부터 완고를 향한 무수한 퇴고가 이어지긴 합니다만. 그런데도 초고를 완성하고 나면 든든합니다. 일단 초고가 있어야 다음으로 건너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부분을 삭제하고 다시 쓰게 되더라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보다 무언가를 두고 하는 게 나으니까요. 언젠가 김연덕 시인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어요. 지운 글도 쓴 거라고요. 많이 지우더라도 쓴 거라 생각하면 지우는 일에 더 씩씩해질 수 있습니다.
글쓰기에 올라탄 동안, 제 안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목소리를 글로 옮기는 동안,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 목소리에 거짓이 없고 나로서 진실하다고 느꼈지요. 동시에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야, 하는 자신감도 들었습니다. 진솔한 글이란 그렇게 적히는지도 모릅니다. 남들이 알아주길 바라 한껏 힘을 주거나 멋진 말들을 골라놓은 글이라기보다는 현재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글이요.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생각과 표현을 나만의 방식으로 늘어놓은 글이요. 그러면서도 자신의 생각과 태도를 친절하고도 명료하게, 그래서 담담하게 설명해 가야 합니다.
그런 글을 쓰고 나면 개운합니다. 제가 낼 수 있는 높이의 목소리로 익숙하면서도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린 기분입니다. 그랬던 마음은 어떤 식으로든 글에 묻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날 모임에서 글을 공유하고 나자 글쓰기 모임 멤버들이 작게 감탄사를 보내주었거든요. 네 명이 보여준 진실된 호응, 그걸로 글의 가치는 충분했습니다. 하나의 글은 그걸 읽고 공감해 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존재할 이유가 생깁니다. 글을 써야 할 이유, 하나의 글이 탄생할 이유는 거창하지 않습니다. 제가 읽었을 때 제게 재미있고 흥미로운 글이면 됩니다. 제게 좋은 글이요. 그러다 누군가 한 명의 마음에 닿아 미세하게 파동을 일으키는 글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그거로 글을 쓸 이유는 충분해집니다.
사소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적다 보면 이게 무슨 소용일까, 이건 내게만 해당하는 생각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어요. 그런데도 흐릿한 생각을 문장으로 바꾸어 명료하게 만드는 과정을 거치면 그 과정으로 저는 즐겁습니다. 그러다 때로 누군가의 호응과 공감을 얻습니다. 그러면 기쁨은 배가 됩니다. 제가 좋아서 썼는데 누군가 글에 공감하며 말을 건네는 일도 벌어 집니다. 글로 누군가와 연결되는 일, 저의 문장이 누군가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일이요. 그런 일이 자주 기적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날 글쓰기 모음에서도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이걸 써서 뭐 하지, 하는 질문은 저만 했던 게 아니더군요. 다른 멤버들도 그런 의문을 품은 채 각자의 글을 완성해 들고 왔더군요. 사소한 고민에서 시작된 개인적인 이야기였어요. 하지만 모임에서 공유되는 순간 내밀한 개인의 이야기는 개인이라는 문을 열고 공동체로 나옵니다. 그 자리에 모인 타인의 마음에 닿아 파장을 일으켜요. 누군가의 이야기를 통해 모임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혼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감정이나 일, 혹은 각자 한 번쯤 고민해 보았던 문제나 감정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를 열어 글로 적으면 그 글이 다른 이의 가슴과 생각을 열어주기도 합니다. 개인이 쓴 글이 여럿에게 읽히면서 타인과 나를 잇는 고리 같은 게 됩니다.
모임 멤버 중 한 명인 섬하님은 지난 제주도 여행에서의 에피소드를 메모식으로 적어 왔어요. 메모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글의 효용 같은 건 없을 거라 생각했데요. 하지만 독자인 다른 멤버들은 섬하님의 짧은 메모에서 칭찬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했고, 타인에게 갖는 관심도 사랑이라는 걸 확인했어요. 쓰는 이는 모르는 효용을 독자가 찾아낸 거죠. 섬하님은 의도하지 않았던 의미까지 읽어낸 멤버들의 의견을 듣고 메모였던 글을 하나의 완결된 글로 완성해 보겠다고 포부를 밝혔답니다. 단상이 메모가 되었기에 글로 재탄생할 기회가 만들어졌어요. 타인과 공유했기에 공유로 인한 겹이 생겼고요. 섬하님의 사례가 제게 이런 걸 알려주었어요. 일단 글로 적으면 글로 쓸 때는 몰랐던 무언가가 만들어진다고요. ‘써서 뭐 하지? 이 글이 무슨 소용일까?’ 하며 던졌던 질문, 그 불확실함 속에 가능성의 씨앗이 숨어 있다고요. 그러니 일단 써야 합니다. 무엇이 될지 모르니까요.
어쨌든 쓰고 봐야 합니다.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가능성이니까요. 시도해야지만 탄생하는 무엇이 있습니다. 우선 흙덩이를 붙이고 손을 대어야지만 어떤 형태든 빚어지는 조형물처럼요. 이 글도 그래서 썼어요. 지난번 글을 썼던 경험과 모임에서 얻었던 발견을 글로 옮겨 기억하고 싶어서요. 쉽게 휘발되는 생각을 글로 고정해 두었으니 그것만으로 제 마음은 안도합니다. 이 글을 읽은 어떤 이는 오늘 쓰려던 글을 미루었다 이 글을 읽고 끝내 하나의 글을 완성할지도 모르고요. 누군가의 마음에 나도 써야겠다고 군불을 지필지도 모릅니다.
이 글을 가장 큰 효용은 저 자신에게 있습니다. 왜 써야 하는지 스스로 되새겨 보았으니 내일도 어김없이 2,000자든 3,000자든 쓸 이유가 생겼거든요. 당분간은 ‘왜 써야 하지?’라는 질문 없이 그냥 쓸 것 같습니다. 계속 써야 할 빌미를 이런 식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계속 노력하는 건 가치 있으니까요. 그게 무엇이든지요. 남들이 몰라주더라도 가치를 둔 일에 꿋꿋이 노력을 기울이는 자신은 꽤 믿음직스럽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상 우리를 심사하고 감독하고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자신뿐이다. 나 자신을 용감하게 마주하고, 나를 보호하고, 내가 나아갈 길을 지켜야 한다.”
<오직 쓰기 위하여> 천쉐, 글항아리
오늘도 이로써 제가 나아갈 길을 지켰습니다. 당신도 그러길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