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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감이라는 구슬 모으기

계속 쓰기 위한 팁

by 춤추는바람



“글쓰기는 자기 자신이, 자기 머리가, 자기 몸이 알지 못하는 미지의 존재다. 글쓰기는 성찰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 곁에, 자신과 나란히, 그렇게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의 능력이다. 다른 사람, 사유와 분노를 품은, 스스로의 행동으로 인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그 사람이 나타나서, 앞으로 나아간다.”
46쪽,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 윤진 옮김, 민음사



쓰기 전에는 모른다. 내가 무엇을 쓰게 될지, 어떤 결론에 닿게 될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말처럼, 글쓰기는 미지의 존재다. 글쓰기는 나도 몰랐던 내 안의 미지, 내 안의 다른 사람을 끌어내 어딘가로 나아간다.


최근 사과 타르트에 관한 글을 썼다. 9월이 되어도 쉬이 가시지 않던 더위 때문에 영영 가을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시간은 어김없이 흘렀고 어느덧 좌판에는 빨간 사과가 깔렸다. 가을이 왔다는 기별 같고 연락이 끊겼던 친구에게 느닷없이 걸려 온 전화 같았다. 그 기쁨을 쥐어 보고 싶어 사과 타르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글을 썼다. 쓰기로 약속했기에(마감일을 정해 놓은 글) 쓰기 시작했지만, 쓰다 보니 뜻밖의 이야기에 닿았다.


2주마다 ‘디저트’를 소재로 쓴 글을 브런치와 오마이뉴스에 연재한다. 연재를 위해 디저트를 만드는 셈인데, 시작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일상적으로 디저트를 만들지 않기 때문인지, 어쩌다 마음이 동해 디저트를 만든 날엔 무언가 쓰고 싶었다. 그날 날씨와 바람, 햇살이나 분위기가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려 베이킹을 하고 싶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여느 날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미세하게 다른 무언가가 있다. 디저트를 만들자고 결심하고 몸을 움직이면 그 무언가가 기억의 주머니를 톡 건드렸다. 가벼운 두드림에도 기억의 창고는 실밥이 터진 듯 기억의 구슬을 쏟아냈다. 몇 번 그런 경험을 하고는 이걸 의식처럼 사용해볼 수 있겠다 싶었다. 디저트를 만들면 풀려나오는 기억을 모아 글을 써보자고.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구슬을 모으면 내게도 낯선 글이 써질 것 같았다.


디저트에 대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특정한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글을 쓸 생각은 없었다. 그건 아무래도 쓰는 내게 재미가 없어서다. 디저트를 핑계 삼아 계속 써야 할 구실을 만들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다. 그러니 디저트라는 껍질을 입었을 뿐 결국은 나를 둘러싼 삶의 이야기였다. 쑥이 나오는 봄을 쓰고 싶어 쑥 케이크를 만들고, 아이 생일에 관해 쓰고 싶어 생일 케이크로 치즈 케이크를 만들었다. 그럴 때면 굳이 케이크를 만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상황을 의도하는 게 억지 같았다. 글을 쓰려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거나 그림을 감상하는 건 당연하게들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글을 쓰려고 ‘디저트를 만든다’라는 행위도 특별할 건 없다.


그걸 반복하다 보니 글을 쓰려 디저트를 만드는지, 디저트를 만들어 글을 쓰는지 순서가 모호해졌다. 그럴수록 베이킹을 하고 그걸 엮어 글을 쓰는데 흥미가 동했다. 시계 속 태엽 두 개가 맞물려 돌아가듯 베이킹을 하는 사이 글감이 자랐기 때문이다. 손으로 케이크나 타르트 반죽을 만지작거리느라 분주한 틈에도 무의식적으로 머릿속 뇌세포는 글감을 향해 뻗어나갔다. 노력하지 않아도 기억의 주머니가 열리고 구슬들이 굴러 나왔다. 책상 앞에서였다면 떠오르지 않았을 에피소드와 단상들이. 그러니 케이크가 오븐에서 부풀어 오를 때 즈음이면 내 안에서도 없던 마음이 빼꼼 솟았다. 글을 쓰고 싶다, 라고.


디저트가 아니었어도, 봄에는 쑥에 대해, 아이 생일엔 어떤 케이크를 먹었는지를 썼을 것이다. 그런데도 디저트를 만든 사건이 등장하자 뜻밖의 연결이 생겼다. 쑥 케이크를 만드느라 쑥에 대해 검색했고 쑥이라는 식물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꽃들이 떼로 핀다는 걸 발견했는데 쑥 케이크를 나누어 먹던 모임에서 우리도 쑥꽃처럼 떼로 모여 있다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일본에서 유행이라는 비싼 치즈 케이크에 대해 우연히 들었는데 내가 만든 치즈 케이크에 맛있다고 칭찬하는 딸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나자 값비싼 케이크가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이처럼 디저트를 만들자 없던 고리가 생겼다. 낯선 고리를 글에 연결하면 나도 몰랐던 내 안의 문 하나가 열렸다. 거기서 이전엔 들어 본 적 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복숭아 타르트를 만든 덕분에 좋아하는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의미를 되새겨 본 일이나 사과 타르트를 만들고 글을 쓴 덕분에 잊고 있었던 옛 친구를 기억에서 소환했던 일도 그랬다. 디저트를 만드는 사이 엉뚱한 방향으로 생각이 자랐고 그걸 글로 꿰어 냈기에 내 안의 생각을 명료하게 다듬을 수 있었다. 베이킹을 했기 때문인지, 글을 썼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베이킹이라는 의식이 내게 글감을 모아주고 글을 쓰고 싶은 마음에 불을 지핀다. 그 힘을 받아 글을 써내면 나도 모르는 무언가에 닿기도 한다. 그러니 12편만 쓰자 했던 초반의 목표가 어느새 20편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30편 즈음은 써보자 생각한다.


글쓰기는 의미를 꿰는 과정이다. 디저트를 만드는 사이 뇌세포에서 방출시킨 글감이라는 구슬을 모은다. 그걸로 목걸이나 팔찌, 반지라도 만들려면 실로 구슬을 꿰어야 한다. 하지만 구슬이 있어야 실로 꿰는 일로 넘어갈 수 있다. 작가라면,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일상의 모든 과정에서 구슬을 모을 것이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줍듯 수시로 줍고 모으기를 반복한다. 모으기만 해서는 글이 되지 않는다. 모은 걸 잘 관찰하고 깊이 들여다보아야 실로 꿰는 단계로도 나아갈 수 있다. 글감은 우리 주변에 항상 존재한다. 그걸 구슬로 바라볼지, 어떤 구슬을 주울지는 당신에게 달렸다.


때로는 직접 구슬을 만들어 볼 수 있다. 글을 쓰려고 베이킹을 하는 나처럼. 그런 작위적인 선택도 때로는 효과가 좋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쓰지 않고 절망하는 대신 사소한 걸 시도하며 계속해보면 좋겠다. 그러다 일상의 숨은 얼굴을 발견하거나 내 안의 다른 사람을 마주해 작게 감탄하면 좋겠다. 하나의 글을 완성했다는 기쁨으로 잠시 환하면 좋겠다. 당신이 지금 슬럼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면 글을 쓰기 위해 운동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취미에 도전해보면 어떨까.


디저트 따위 더 이상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한 적도 있지만, 내 손으로 만든 케이크와 타르트, 쿠키에만 담기는 온기와 다정을 잊지 못해 때가 되면 재료와 도구를 꺼내고 오븐을 켠다. 언젠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나를 녹이기 위해 밝고 따듯한 약간의 온기가 절실했고 그때 이 오븐으로 작은 온기를 지었다. 또다시 오븐을 켜는 건 하나의 의식이자 나와의 약속이다. 글감을 불러일으키는 의식이자 그걸 모아 글을 쓰겠다는 약속. 아직은 무언지 알 수 없는 내 안의 영감을 종이 위에 풀어 무럭무럭 키워보겠다는 약속.


오븐 안에서 반죽이 열기를 받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부풀어 오르듯 종이 위에서 글자들이 팽창한다. 내게 필요했던 작은 온기를 만들기 위해 움직이던 손이 조금 더 욕심을 낸다. 먹고 나면 사라지는 케이크 말고 쉽게 지워지지 않는 문장을 짓고 싶다고. 그 문장이 누군가를 만나 그에게도 작은 온기를 지필 용기를 내게 하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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