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걸 계속 좋아해보려고요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일은 소중하다. 좋아하는 걸 계속 하다 보면 창의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무지개를 좋아했던 딸아이는 지금도 무지개를 자주 그린다. 하루는 '무지개 나라'라는 제목의 그림을 들고 왔다. 빨주노초파남보, 층층이 쌓인 무지개가 해체되어 개별 색선으로 떠다녔다. 모퉁이마다 색깔별 집도 그려졌다. “각자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귀여운 안내 문구가 보였다. 무지개는 본래 하나가 아니라 따로 존재했던 색들이 모여 무지개가 되었다 흩어지는 걸 수도 있구나! 아이의 아이디어가 기발했다. 좋아하는 대상을 반복해 바라보고 골똘히 생각하는 사이 창조성이라는 것도 생긴다.
아이가 좋아서 무지개를 반복해 그리듯 내겐 일기 쓰기가 그랬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시키지 않아도 꼬박꼬박 일기를 썼다(일기만 40년 가까이 써 온 사람, 여기 있습니다). 얼마 전 창고 정리를 하다 초등학교 때 쓴 일기장을 발견했다. 무얼 적었나 들춰 보니 특별한 이야기라기보단 시시콜콜한 날마다의 일이 적혔다. 그런데도 담임 선생님께서는 "재미있다." "잘 썼구나." "네 마음을 잘 표현했구나." 같은 칭찬을 적어주셨다. 어떤 날엔 "요즘 일기 쓰기가 싫은가 보구나. 양이 많이 줄었다."라는 따끔한 충고도 건네셨다.
그 시절 운 좋게 글쓰기에 진심인 선생님을 만나(5, 6학년 2년간 같은 선생님이 담임 선생님이었다.) 일기 쓰던 어린이가 글 쓰는 어른이 되었다. 삶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일기장을 펼쳤는데 그게 가장 쉽고 익숙해서였다. 말로 속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보다 글로 적는 게 편했다. 빠르게 정리해 발화해야 하는 말보다 천천히 되감아 다시 풀어내며 살필 수 있는 글이 나의 성정과 속도에 맞았다. 빠르기를 요구하는 삶에 쫓기더라도 백지를 펼치면 숨을 고르고 서툴게 찍힌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었다.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상황과 놓쳐버렸던 타인의 마음, 상처받은 나의 내면을 돌볼 수 있었다. 일기장에 이름을 붙여 부르기도 했으니 가장 편안하고 다정한 비밀 친구이기도 했다. 매일 일기를 써 온 지 6년째, 힘내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가능했다. 어릴 적부터 몸에 배 편안한 일, 좋아했던 일이라 계속한다.
마감을 앞둔 일로 정신없던 저녁, 일하는 내 옆에서 딸아이가 나의 어릴 적 일기장을 읽었다. 이제는 기억도 희미한 에피소드를 물으며 이런 일이 있었데, 하면서 혼자 키득거렸다. 재미있다며 한동안 일기장을 읽었다. 그걸 쓰던 5~6학년 때의 나는 이런 미래를 상상하지 못했다. 나의 처녀작이라 할 수 있는 작품집에 나의 딸이 첫 독자가 되는 일. 초등학생인 딸이 내가 초등학생 때 쓴 일기를 읽는 미래. 딸아이는 일기장이라는 문을 열고 들어가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고 있을까. 엄마라는 가깝지만 멀기도 한 존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엄마에게도 서툴지만 재미있고 진지한 구석도 보이는 어린이 시절이 있었다는 게 반가웠을지도. 지금의 나로는 보여줄 수 없는 나의 가장 깊고 오래된 뿌리를 아이와 공유하는 것 같았다. 일기장이 나라는 사람의 기록물 같아 가치 있게 느껴졌다.
여전히 일기를 쓴다. 시간이 가뭇없이 사라지는 게 슬퍼서, 하루가 무의미하게 흩어져 버리는 게 헛헛해서 쓴다. 쓰지 않을 때보다 쓸 때의 내가 훨씬 나아서 쓴다. 대단한 걸 기록하겠다는 목표는 없다. 하루를 돌아보며 내가 놓쳤던 낌새나 완전히 해소되지 못한 감정과 질문을 찾는 것으로 족하다. 매끈한 하루에 안도하는 대신 매끈해 보이지만 실은 가느다랗게 금이 갔던 순간을 다시 돌아본다. 아무렇지 않은 듯 넘겼지만 아무렇지 않지 않았던 자리를 더듬어 보며 질문한다. 이건 뭘까? 왜 그런 걸까?
안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모르는 감정일 때도 있고 맞다고 믿었던 생각이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을 때도 있다. 천천히 그 일을 적고 되감고 다시 풀어보는 과정을 통해 발견한다. 여전히 모르는 게 많다는 걸 깨닫고 실수하고 틀릴 수 있다는 걸 확인한다. 다시 적으며 완벽하지 않지만 나름의 답을 찾기도 한다. 외부로부터 의심 없이 받아들여 답이라 여겼던 생각을 내게서 떼어 내 나다운 답으로 고쳐 쓴다. 정답이란 없으니 정답에 갇히는 걸 더 경계하면서. 다른 방식, 다른 삶, 낯선 생각, 뜻밖의 선택, 의외의 행동과 말에 더 유연해지자고 나를 주물러 본다.
일기 쓰기는 세상이 들려주는 뻔한 답이나 강요에 저항하는 수단이 되어 준다. 그것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라는 사람, 내 삶에 필요한 답을 찾기 위해 연습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누구도 들려주지 않았던 답을 찾기도 한다. 내게 필요한 말, 내가 듣고 싶은 말, 내게 용기를 건네고 북돋워 주는 말을 스스로 들려줄 수도 있다. 수시로 우리를 끌어내리고 탓하려는 세상, 너는 틀렸고 나약하고 패배자라고 비웃는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뿌리를 내리기 위해, 흔들리더라도 뽑히지 않기 위해 나다움을 만든다. 글을 쓰며 내 안의 언어를 다듬어 뿌리를 키운다.
물론 일기 쓰기가 전부는 아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글쓰기가 있고 내게 가장 익숙하고 손에 맞는 방식으로 일기 쓰기를 택했을 뿐이다. 나도 일기만 쓰는 건 아니다. 일기를 빙자한 서평이나 에세이로 쓰기의 영역을 넓혀간다. 나만 보던 일기에서 타인에게 말을 거는 일기로 건너가는 중. 그러면서 나라는 조리개를 열고 있을까.
독서와 글쓰기라는 두 바퀴를 삶의 기반으로 채택한 뒤로 두 번째 삶을 사는 기분이다. 오래도록 가장 해보고 싶었던 일에 전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삶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고 스스로에게 필요한 말을 책과 글쓰기를 통해 얻었다. 그러면서 타인의 시선과 외부로부터 부여되는 책임, 스스로 나를 옭아매는 편견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진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을 찾아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시도해본다. 비로소 나답게 삶을 꾸려가는 것 같다.
며칠 전 키티 크라우더의 전시회를 다녀왔다. 유연한 선과 풍부한 색으로 자유로운 세계를 짓는 그림책 작가다. 그는 <밤의 이야기>, <아니의 호수>, <메두사 엄마>, <작은 죽음이 찾아왔어요>와 같은 작품에서 죽음, 상실, 차별, 신의 존재 같은 무거운 주제를 부드럽고 재치 있게 전달한다. 밝고 귀여우면서 엉뚱해 보이는 그림 속 캐릭터들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상황과 일 앞에 용감하게 대처하는 동시에 따스함과 깊은 성찰을 건네 독자의 내면을 어루만진다.
그런 작업을 해 온 키티 크라우더가 창의성의 비밀로 ‘기쁨’을 꼽았다. 창작을 두려워하는 마음에는 ‘독특하고 훌륭한 것을 내놓아야 한다’라는 거창한 목표가 있는 경우가 많다고, 그래서 창작을 어려운 일로 대한다고 그는 말한다. 자신은 창작의 목표로 기쁨만을 둔다고 강조한다. 창의적이라는 단어가 기쁨의 동의어라고 말하며 ‘이 색을 칠해보고 싶어!’ ‘이렇게 그려보고 싶어!’와 같은 충동과 설렘, 기쁨으로 창작을 지속한다. 자신의 기쁨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짓는다는 예술가의 말이 반가웠다.
언젠가 글을 쓰는 이유가 무언지 모르겠다는 나의 질문에 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좋아서 쓰죠.” 한창 무언가 괜찮은 글, 남들에게 쓸모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던 때였는데 그의 명쾌한 대답에 가슴을 답답하게 하던 체증이 단숨에 내려갔다. 쓰기의 목적이란 쓰는 이의 즐거움이며 글의 쓸모란 그다음의 문제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그저 좋아서 써도 된다는 확인에 안도했다.
쓰는 게 즐겁지 않으면 그 일을 피해 도망 다니게 된다. 글쓰기를 미루게 되고 쓰는 시간이 괴로워진다. 그러려고 이 일을 삶의 바퀴로 삼은 건 아니다. 손끝에서 문장이 풀려 나오고 그 문장의 리듬을 따라 편안하게 숨 쉴 때 나다움이라는 걸 느꼈다. 잘 쓴 글이 아니라 온전한 나의 목소리가 들리는 글을 쓸 때 잔잔하게 기쁘다. 그러니 이렇게 저렇게 써 보다 뜻밖의 이야기에 닿고 싶다. 미지의 숲을 향해 나아가듯 글쓰기라는 숲으로 하염없이 걸어 들어가 보고 싶다.
무지개 그림을 반복해 그리던 아이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려내는 걸 보며 감탄했다. 그건 거창하지 않아도 자기만의 아이디어로 근사할 수 있음을 발견한 기회였다. 지금은 뻔한 글, 고작 일상을 나열한 글을 쓰지만 반복해 쓰다 보면 나만의 방식, 문체나 스타일, 고유한 사고가 선명해질지 모른다.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을 지속하는 게 내 삶을 창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니 좋아하는 것을 잘 좋아해 보자고 생각한다. 대충 좋아하지 말고, 좋아하는 걸 잃어버리지도 말고, 깊이를 만들고 어떤 모서리는 뾰족하게 다듬어보면서. 거기서 언젠가 창의성이 새어 나올 것이다.
좋아하는 걸 해도 괜찮아. 좋아하는 걸 더 많이 좋아해도 좋아. 좋아하는 너만의 세계를 풍성하게 지어 그곳으로 누군가를 초대할 수도 있을 거야. 글쓰기를 통해 나와 타인에게 그런 이야기를 전한다. 각자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즐거움을 짓고 그 기운으로 부드럽게 풍성해지는 세상을 상상한다. 좋아하는 것들이 교차하며 빚어내는 이상하게 아름다운 화음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