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안아주는 말
점심을 먹고 도서관을 향해 걸었다. 비가 와서 우산을 쓰고 걷는데 빗물이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맨다리에 살짝 튀었다. 산책하기에 적당한 정도의 비랄까. 비가 내려 더위는 가시고 옷이 젖을 정도는 아니라 속도를 내지 않아도 괜찮았다.
조금 걷는데 처마 아래 우산을 쓰고 앉아 전화 통화를 하는 요구르트 아줌마가 보였다. 요구르트를 보관하는 이동 전동차엔 비닐이 덮여 있었다. 아줌마에게도 휴식 시간은 필요하겠지. 비가 오는 날 길가에 앉아 전화를 걸 만큼 친근한 이는 누구일까. 괜한 궁금증이 일었다. 음식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나는 무를 안 좋아하잖아. 아줌마가 말했다. 그 말을 듣는데 나도 갑자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그 순간 오래 전 두꺼운 책 사이에 넣고 잊어버린 쪽지가 우연히 발 밑에 떨어지듯, 과거 한 시절이 내 앞에 펼쳐졌다. 전철역에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어 눈물이 핑 돌았던 그때가.
대학교 2학년, 휴학을 하고 대입 시험을 다시 준비하던 때였다. 도서관과 독서실을 오가며 공부하느라 매일 혼자였다.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들어오는 생활이라 가족들과 대화할 새도 사라졌고. 나도 모르게 외로움이 두텁게 쌓였나 보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가던 전철역에서 갑자기 눈물이 터지고 말았던 건. 누구 하고 든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던 건.
친했던 학과 동기와 동아리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리움이 차 올라 눈물이 흘렀다. 급작스레 휴학을 결정했고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은지 오래되어 갑자기 연락하는 게 오히려 난감했다. 어떻게 지내?, 보고 싶다, 며칠 전에 영화를 봤는데 옛날 생각이 났어, 그때 내가 한 말이 틀렸다는 걸 알았지, 그냥, 그 얘기가 하고 싶더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홀로 마음을 다독였다.
그리고 또 한 시절. 대형 마트에서 홀로 일했던 때가 떠올랐다. 판촉 아르바이트를 서너 달 정도 했는데 마트 소속이 아니라 제조사 파견직이라 혼자 일하고 혼자 밥을 먹었다. 매대 끝 별도로 꾸려진 자리에서 원두를 팔았다. 제품을 홍보하느라 하루 종일 목소리를 돋아 말을 했지만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속에 쌓였다. 점심은 뭐 먹었어?, 좀 피곤해 보이는데, 어제 퇴근해서 뭐했어?, 이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소란스런 환경 속에서 문득 멍해지고 말았던 건 외로움 때문이었다.
그러다 매장 경호원 아저씨와 친해졌다. 짙은 회색 정장에 검은 넥타이 차림, 얼굴도 말쑥했던 아저씨. 아저씨는 무전기를 들고 정해진 시간에 매장을 돌았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이에 인사가 오갔는데, 아저씨는 바쁘게 지나가다가도 잊지 않고 눈인사를 건넸다. 그러면 나는 반가움에 인파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아저씨의 뒷모습을 시선으로 좇았다. 서서히 아저씨가 지나가는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고 조금 늦기라도 하면 궁금한 마음이 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