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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May 11. 2021

시간은 흐르고 모인다

서로에게 발맞추려는 마음





저녁을 먹고 아이와 단둘이 원두를 사러 나갔던 날이다. 천천히 걷고 싶었다. 며칠 퍼붓던 비가 간신히 그쳤지만 먹구름은 걷히지 않았다. 눅눅한 습기가 여름을 답답하게 누르고 있었다. 집안의 공기도 무겁게 내려앉아 발바닥에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아이를 데려가기엔 카페까지 꽤 거리가 멀었지만 남편도 없는 집에서 잠들 때까지 아이와 투닥거리느니 밖으로 나가보자 싶었다. 문을 나서자 바람이 우리를 반겼다. 선선해진 저녁 바람이 장난이라도 걸고 싶다는 듯 와르르 달려들었다. “아, 시원해!” 둘이 기분 좋게 외쳤다. 서두를 필요도 없는 길, 비눗방울을 날리고, 놀이터에서 그네도 타면서 천천히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왔다.



철물점 간판 위로 기세 좋게 뻗어 난 줄기에 기다란 수세미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저게 뭐지?” 시치미 떼고 물었더니 아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오이!” “오이는 저것보다 가늘지 않아?” 그랬더니 “아, 호박이네, 호박.” 하고 답했다. 철물점 옆으로는 이발관이 나란히 붙어 있다. 그 앞 대추나무엔 대추가 주렁주렁 열렸다. “저것 봐, 초록색 열매가 엄청 많이 달렸다.” 아이가 말했다. “저건 포도야, 저게 자라서 청포도가 되는 거야.”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웃으며 그럭저럭 맞장구를 쳐주었다. 굳이 아니라고 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서. 포도가 될 수도 있고, 대추가 될 수도 있고, 제멋대로 상상하는 즐거움이 무엇이든 키울 테니까. 



아이 눈에는 온갖 사소한 것들이 신기하게만 보였나 보다. 나와 딸 아이는 두런두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쓸데없는 데서 킥킥 웃음이 터졌다. 말없이 조용히 걷는 것만 산책인 줄 알았는데, 이런 산책도 있다. 발걸음 하나 하나에 말풍선이 맺히는. 어김없이 웃음이 매달리는. 과자 봉지 속에 손을 넣고 별사탕을 찾으려 뒤적이던 때처럼 올망졸망한 즐거움이 가슴에서 피어올랐다.



카페에 들러 원두를 사고, 길가에 있는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다시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힘들어.”하고 아이가 말했다. 하는 수 없이 아일 등에 없었는데, 그것마저 좋았다. “이제 조금 더 크면 업지도 못하겠어, 너무 빨리 크지 마.”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흘러나왔으니까. 원두가 든 가방이 묵직해진 만큼 발걸음도 느려졌다. 그래도 저녁을 배웅하고 밤까지 마중하고 돌아오는 마음이 넉넉했다. 



아이가 걸음에 서툴던 작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이런 저녁도 가능해지는구나. 아이랑 손잡고 슬슬 걸어 동네를 돌아오는 저녁 말이다. 답답한 집에서 더위에 짓눌려 아이와 씨름하는 대신, 바람을 만나고, 길 위의 풍경을 아이의 시선으로 다시 써 보는 시간. 잠잠한 산책 대신 바스락거리는 산책이었다. 앞으로의 많은 날에 그런 산책이 있을 거라 생각하니 옆구리가 간지러웠다.



집에 도착했을 땐 땀과 열기로 온몸이 끈적거렸다.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고 차가운 멜론을 먹었다. 선풍기 앞에 앉아 아이의 머리를 말려주는데 아이가 뒤로 기대더니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아이의 얼굴 쪽으로 쏟아져 내리려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쓸어 내리며 머리를 말렸다. 드라이어가 바람을 만들어 내는 소리가 웅웅 거리며 우리를 감쌌다. 가만한 시간이 내려앉았다. 문득 아이 얼굴 위로 아이만 했던 내 얼굴이 보였다. 시간은 흘러 사라지는 줄 알았는데 어딘가 고이기도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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