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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Jun 07. 2021

나도 내 마음이라는 게 있지

있는 그대로를 끌어안기




나도 내 마음이라는 게 있지

 

“나도 내 마음이라는 게 있지. 아빠는 왜 아빠 마음대로만 하려고 해?!” 딸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꼭 마쳐야 할 일이 있어 아이가 아빠와 잤으면 싶었는데 기어코 방을 나와 내가 있는 서재로 왔다. 엄마가 곁에 없으면 잠들지 못하고, 어떡해서든 나와 자고 싶어 하는 아이의 마음을 알기에 애초에 먼저 자라고 설득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랑 같이 자고 싶은 딸바보 아빠가 애타게 아이를 불렀다. “서윤아~, 얼른 자자!” 그 말에 어린아이가 똑 부러지게 한 마디 했다. “엄마랑 잘 거라고! 나도 내 마음이라는 게 있다고! 흥! 치이!”


컨디션이 가라앉고 몸이 무거워 힘들었던 하루다. 머리가 지끈거려 잠시 소파에 누우려 했더니 아이가 눕는 건 안된다고 했다. 며칠 전부터 소파는 아이의 새로운 아지트로 변신한 상태였고 아이의 허락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피곤해 안된다는 말을 무시하고 소파에 누워 버렸다. 엄마도 엄마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네 마음대로만 하는 건 아니라고 말하고 눈을 감았다. 같이 안 놀아준다고 아침 내내 입이 나와 있던 아이가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이 애처로워 아이를 끌어안고 토닥여 주었다. 서운한 마음은 공감하면서 ‘엄마의 마음’도 이해해주면 좋겠다고 아이를 타일렀다.


낮에 내가 했던 말을 아이가 이토록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엄마의 마음’이라는 게 있으니 그걸 좀 알아 달라고 했던 말을 자신의 마음에 찰떡같이 가져다 붙인 아이가 맹랑하면서도 귀여웠다. 정신없이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데도 웃음이 비어져 나왔고 그 사이 바닥에 깔 작은 이불까지 들고 나온 아이가 낮에 입고 있던 반팔 원피스를 벗고 긴팔 내의로 갈아입고 있었다. 이불을 안 덮고 자 밤에는 긴팔로 갈아 입혀주는데 엄마 곁에 있으려는 심산인지 시키지 않았는데 혼자 옷을 갈아입었다. 


내가 앉아 있는 의자 옆, 책상과 책장 사이 작은 공간에 이불이 깔렸다. 아이는 거기 앉아 아기일 적 사진이 담긴 앨범을 꺼내 뒤적거렸다. 일에 몰두해 있는 사이 몇 번 언제 자냐고 몇 번 묻던 아이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었다. 한참 뒤 침실로 가보니 아빠 곁에 잠들어 있었다. 엄마랑 자고 싶었지만 졸음을 참지 못한 아이의 마음이 어여쁘면서도 안쓰럽고, 아이를 기다리게만 한 것 같아 미안했다. 조심스레 아이의 손을 쥐었다. 




내 마음을 몰랐던 어린 시절의 나


어릴 적 나는 싫다 소리를 못하는 아이였다. 집안에는 넷이나 되는 아이가 있었고 엄마는 힘에 부쳐 화를 낼 때가 많았다. 매사 토 달고 대들며 집 안을 뒤집는 언니가 있었고, 그런 언니와 엄마는 날마다 전쟁을 벌였다. 언니에게 튀는 엄마의 불똥에 지레 겁먹고 말대꾸 하나 없이 내 할 일 잘하는 ‘착한 딸’로 컸다. 그렇다고 불만이 없었던 건 아니다. 내게도 마음이라는 게 있었지만 그걸 표현할 방법을 몰랐다. 엄마한테 혼날까 봐, 속상한 일도 말 못 하고 참기만 했다. 갖고 싶은 걸 사달라고 조른 기억도, 싫다고 투정을 부린 기억도 별로 없다. 하지만 다툼 없이도 상처는 생긴다. 


사춘기는 대학교 때 찾아왔다. IMF로 아빠는 일자리를 잃었고, 가계는 휘청거렸다. 부모님 사이가 급속도로 나빠졌고 내 눈에 그 모습이 실망스럽기만 했다. 이해하려는 마음보다 반발심이 커졌는데 그 시기는 부모님에게 속해 있던 유년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나아가던 때였다. 모든 게 불만스럽고 못마땅했으니까. 하지만 대들거나 싸우지는 못하고 엄마에게 싸늘하게 대하는 걸로 불만을 표출했다. 비뚤어진 방식이었지만 나의 반항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되돌아보면 이 옷이 싫고, 그 반찬이 싫고, 학교 가기 싫다고, 사사건건 쏘아 부치며 엄마랑 싸웠던 언니가 차라리 건강하게 관계를 쌓았구나 싶다. 구체적으로 말하는 대신 차갑고 날카로운 감정으로 방어벽을 쳤던 나는 불만을 해소하는 게 아니라 담아두기만 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나 또한 엄마가 되면서, 어린 시절 엄마에게 서운하고 원망스러웠던 감정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심적으로는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지금도 엄마와의 사소한 충돌에서 좌절감을 느낄 때면 사춘기 소녀에서 얼마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사사건건 "싫다"는 아이


요즘 아이의 마음과 내 마음이 자주 부딪힌다. 밖에 나가고 싶은데 아이는 싫다고 할 때, 가만히 앉아 쉬고 싶은데 아이는 뛰어놀자고 할 때, 평온하게 감싸주는 음악이 듣고 싶은데 아이는 요란한 동요나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듣자고 할 때, 내 마음은 시소를 탄다. 아이의 의견을 들어주고 싶지만 내 욕구도 무시하고 싶지 않아서. 어떤 날은 자연스레 균형이 맞춰지지만 많은 날 설득의 말과 협박의 말이 내 안에서 실랑이를 벌인다. 언젠가부터 아이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자동응답기처럼 “싫어!”를 내뱉고, 아이를 설득하다가도 제풀에 꺾여 “됐다!” 해버리는 나. 이런 내가 아이를 더 혼란스럽게 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애매한 태도로 의중을 알 수 없게 하는 사람보다, ‘싫음’을 지혜롭게 밝히는 사람과의 관계가 수월하고 편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신의 감정과 의사를 제대로 알지 못해 타인에게 선택을 넘기는 사람들은 같이 있는 사람을 피곤하게 하기도, 때로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는 걸. 싫다는 말이 어렵고 힘들었던 건 그 말이 상대에 대한 부정이나 거부라는 단순한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싫다고 말할 때, 그건 어떤 상황과 선택에 대한 거절의 표시일 뿐, 상대에 대한 전적인 부정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싫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때, 그만큼 상대를 믿을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당신에게는 내 마음을 투명하게 보여주겠다는 친근함과 안심의 징표라고 말이다.


요즘처럼 무서운 일이 비일비재한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아이가 언제 어느 때든 “싫어!”라고, 큰 소리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에게도 누군가 원치 않는 일을 요구하거나 너를 불편하게 하면 싫다고 말하라고 알려준다. 아이가 제 마음의 소리를 의심 없이 “싫어!”하고 표현하길 바란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날아오는 아이의 “싫어!”에는 거부감이 드는 모순적인 마음이라니. 은연중에 그걸 아이의 반항이라고 해석하는 걸까. 그래서 반감이 들고 기분이 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가 어른인 내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건 아니다. 몸집이 크고, 더 오래 살았다고 당연히 우선권을 가질 수 있는 건 더더욱 아니고. 우선권이라는 게 있다면 작고 약한 아이에게 더 필요한 것일 테다.  


쉴 새 없이 “싫어!”라고 말하는 아이를 좋아하기로 했다. 그만큼 아이의 마음이 자라고 있다는 표시라고 받아들인다. 아이가 자기 안에 마음이라는 게 있고, 그것이 소중하다는 걸 배우고 있다고. 그러니 내 마음이 중요하고 존중받고 싶은 만큼 아이의 마음을 소중하게 여기고 존중해줘야겠다. 힘이 세고 더 많이 알기 때문에 선택하고 통제할 수 있는 내가, 작고 여리고, 모르는 게 많아 힘이 없는 아이에게 져주는 게 맞다. 




너와 나의 마음이 공존하는 삶


“나도 내 마음이라는 게 있지.” 아이가 그 마음을 소중하게 지키고 잘 키워가면 좋겠다. 예전에는 노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며 아이의 마음을 엿보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놀이에 빠져 있는 아이의 마음을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싶다. 내가 눈감아줘야 무럭무럭 자라는 어떤 세계도 있을 것 같다.


남들은 잘 모르는, 나만 아는 마음이 얼마쯤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가깝고 친밀한 관계일지라도, 어느 정도의 비밀이 허용될 때 그 관계가 매력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고. 숨어 있기 좋은 카페나 비 오는 날을 즐기는 나만의 목록을 가지고 있을 때, 남몰래 흠모하는 작가나 혼자 보고 은밀히 되새기는 영화와 책을 품고 있을 때 나는 내게도 흥미로운 사람이 된다. ‘내 마음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아는 아이에게도 하나 둘, 비밀이라는 씨앗이 자라길 상상을 해본다. 아이만이 아는 상상의 놀이, 아이만이 품고 있는 비밀의 정원이 생기길 바란다.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있으면 아이는 어김없이 책상 밑으로 들어와 놀이를 한다. 자세를 바꾸느라 다리를 움직이면 언제 가져왔는지 레고 블록이나 인형이 발에 차인다. 아이는 책상 아래 앉아 제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나는 책상 위에 손을 올리고 머릿속 생각을 노트북 위에 풀어낸다. 나는 아이의 마음을 알아채려고 귀 기울이지 않고 아이 또한 내 마음의 흐름을 훼방 놓지 않는다. 이런 순간이 오길, 오랫동안 꿈꿨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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