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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Jul 09. 2021

미안해서 애틋해지는 사이

당신에게 건네고 싶은 말



목요일마다 아파트 단지에 장이 선다. 과일 가게, 야채 가게, 생선 가게 등 식재료를 파는 가게들이 천막을 치고 늘어선다. 그 곁에 닭강정이나 족발을 파는 곳, 떡볶이와 어묵, 튀김을 파는 분식집도 있다. 아이와 나는 종종 거기 들러 떡볶이랑 튀김을 사 먹는다. 지난번 떡볶이를 사면서 다음엔 오렌지와 포도맛 슬러쉬를 사주기로 약속한 걸 기억하고 아이가 며칠 전부터 요일을 헤아렸다.



드디어 목요일,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리고 돌아오면서 포장마차에 들러 오징어 튀김과 옥수수, 그리고 아이가 고대했던 슬러쉬를 샀다. 집으로 돌아와 사 온 음식을 식탁 위에 펼쳐 두고 아이와 나누어 먹었다. 목구멍이 얼얼해질 정도로 차가운 슬러쉬를 먹으며 아이는 두 눈을 반짝거렸다.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의자에 기대어 앉아 찐 옥수수를 먹고 있으려니 여름 방학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갑자기 친구가 만나고 싶어 졌는데, 당장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없었다. 혼잣말처럼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없네, 하고 중얼거리니 아이가 물었다.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는 아빠 아니야?"



그렇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남편이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결혼을 하고는 취향이 비슷한 남편과 둘이 서 잘 놀러 다녔다. 한때는 남편만 두고 다른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게 미안할 정도로 둘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남편은, 너무 바빠서 우리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그리고 쉬는 날에는 피곤해서 쉬고 싶어만 한다. 



왠지 방학 같은 날, 남편이 저녁 수업(대학원 수업)을 빼먹고 우리랑 놀았으면 싶었다. 아이와 기대에 차 전화를 걸었는데, 오늘이 가장 바쁜 날이라는 슬픈 소식이 돌아왔다. 아쉬우면서도 남편이 안쓰러웠다. 우리만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 미안했다.



미안함이 다져지면 애틋함이 자란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을 쓴 사람은 바쁜 대신 돈을 많이 벌어다 주어 아내에게 미안한 줄 모르던 시절을 지나, 돈을 못 벌지만 일주일에 두 번 쉴 수 있는 카페 사장이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미안한 남편이지만 그렇게 사는 일도 괜찮은 것 같다고 썼다. 미안한 마음이 다져져 애틋함이 자라고, 서로에 대한 애틋함이 있다면 먹고사는 데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라고 믿게 되었다고.



누군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과거 언젠가, 혹은 언젠가의 미래에, 서로에게 미안하다고 느끼는 일이 우리 사이에도 존재할 것이다. 미안해한다고 뭔가 크게 달라지거나 특별한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데도 애틋한 마음만은 자랄 것이다. 나와 남편 사이에도 미안함이 다져져 애틋함이 자라는 중이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가끔 그런 마음이 든다. 애쓰는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고, 그래서 나와 아이가 누리는 안온한 일상이 고마워진다. 그러면 조금 애틋한 마음이 되어 저녁을 잘 챙겨주고 싶고, 전화라도 걸어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해본다. 삶이 단지 나의 노력만으로 굴러가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 혼자 일 인분의 삶을 가뿐하게 살고 싶다가도, 삼인분의 삶을 우리 셋이 같이 지탱하고 있다는 게 다행스러워지는 날이 더 많다. 



나의 것과 남편의 것, 이제는 아이의 몫까지 더해져, 여러 갈래의 실이 얽히고 섞이어 하나의 삶이 되었다. 그 삶은 서로에게 기대어, 서로의 존재를 빌어 무늬를 그려내고 있기에, 더 이상 어떤 실 하나를 쉽게 빼거나 잘라 낼 수 없다. 이제는 내가 가진 실만으로 원래의 모양을 유지할 수 없고, 세 사람의 실이 어떻게든 엮이어야 제 형태를 갖추고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그걸 일일이 말로 약속하지 않았지만, 가족이 되어 한 집에 살면서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되었다. 서로에게 서로를 빌려주고, 빚을 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서로에게 미안한 마음조차 없다면, 애틋함으로 서로를 감싸지 못한다면, 각자의 수고와 고단함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미안해서 애틋해지는 사이, 그 말이 가슴 한 구석을 뜨겁게 했다. 이 관계가 더 좋아졌다. 서로의 삶을 침범할 수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미안해지는 사이지만, 그래서 남들과 다르게 애틋함으로 그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게 슬프면서 좋고, 이상하면서 미덥다. 그 미묘한 감정이 나를 토닥여 눈물이 날 것 같고, 그래서 오늘은 우리 모두를 더 따스하게 안아줘야겠다는 마음이 된다. 



다음 날 아침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출근하는 남편과 등원하는 아이를 길게 배웅했다. 미안한 사람들과 애틋하게 이별했다. 이 마음으로 저녁을 준비해야지. 밥상은 어제와 아주 조금 다를 테지만 그 작은 차이로 우리는 조금 크게 웃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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