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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Aug 30. 2021

좋은 엄마 말고 나 다운 엄마

온전한 나로 존재하는 법





더위가 한창이던 여름, 양평 언니네 집에서 남동생네와 며칠을 보냈다. 세 살배기 조카와 딸아이는 매일 물놀이를 하고, 마당에서 뛰어놀며 시간을 보냈다. 두 아이에겐 신나는 여름이 아닐까 싶었던 날들. 그 곁에서 나도 느슨해졌다. 매일이 휴가 같아 조금 불안하다가도, 뜨거운 계절이 아이들 몸과 마음에 건강한 흔적을 새기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위로가 되었다.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이 여름을 그리워하게 될 걸 짐작할 수 있어 마음이 놓였다.



세 살배기 조카는 엉뚱한 말과 행동으로 우리를 웃게 한다. 말은 어눌하고, 사용할 수 있는 단어는 몇 개 안 되지만, 누구보다 멋진 표현을 만든다. 지는 해가 구름 주변을 붉게 물들이자 “구름이 아파요” 하던 아이. 그런 조카를 보며 아이들은 모두 시인으로 태어나는구나 생각했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른의 방식에 물들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하는 아이들. 조카에 비하면 제법 커버려 상식이라는 걸 알고 논리적으로 말할 줄 알게 된 나의 딸. 아이가 새삼 어른스러워 보였다. 고작 세 살 차이인데, 삼 년 새 아이가 엄청나게 자랐구나 싶고. 문득 딸아이가 세 살일 때 어땠는지 궁금해 핸드폰 속 사진을 들춰 보았다. 



사진과 동영상을 넘겨보자 지나간 순간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런데도 눈앞의 아이와 사진 속 더 어릴 적 아이 사이 아득한 거리가 놓인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은 지금대로 사랑스럽고 예쁘지만 세 살의 딸아이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아이가 두 돌에 가까워질 즈음 육아에 지쳐버린 나는 아이가 너무 예쁘다가도, 어떤 날에는 아이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 일을 시작했고,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줄었다. 아이와 충분히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힘들다는 이유로 아이의 어여쁜 모습을 온전히 간직하지 못한 건 아닐까. 빨리 자리기만 바랐던 건 아닐까. 한 번 뿐인 시절을 충만하게 누리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미심쩍고, 후회되고, 아쉬운 일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린데도 어쩔 수 없이 서툴고 부족한 부분은 있겠지. 누구도 완벽할 수 없고 나라는 사람 또한 불완전한 인간에 불과하니까. 매일 후회하고 다음날 다시 노력하면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아이가 예쁜 것과 별개로 내게 집중하고 싶은 마음 또한 접을 수 없을 게 뻔하고. 지난 시간을 아쉬워하거나 후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잘못했던 순간, 지우고 싶은 순간조차도, 애를 쓰고 쓰다 어쩔 수 없이 그랬다는 걸. 적당히, 대충 산 적은 없는 것 같다. 낼 수 있는 최선의 힘과 사랑으로 그 시절을 넘었다. 거칠고 미운 날들 사이에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순간이 빼곡하게 들어 차 있으니. 되돌리고 싶어 아쉬운 게 아니라 그리워서 아쉬웠다.



지금에 집중하면 지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듯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분명히 그 시간을 지났기에 여기 도착할 수 있었다. 과거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오늘이라는 지층 아래 축적되어 있다. 우리 몸엔 보이지 않게 마디가 새겨져 있지 않을까. 시간의 마디, 성장의 마디가. 눈으로 볼 수 없을 뿐, 거쳐 온 시간의 마디가 촘촘히 쌓여 있을 것 같다. 그런 나의 몸과 아이의 몸을 맞대면 어떤 마디는 딸깍하고 맞아떨어질 것 같다. 함께 지나온 시간의 흔적이 서로를 알아보고 두 손을 맞잡을 것 같다. 



언젠가 잠자리에서 친정 엄마가 자신의 처녀 적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다. 흑백의 사진에서도 통통한 볼에서는 탄력이, 맑은 눈망울에서는 총기가 느껴졌다. 사진 속 엄마는 생기로 가득한 얼굴로 남아 있었다. 주름진 얼굴, 살이 쳐지면서 작아진 눈, 기미로 얼룩덜룩한 피부. 눈을 들면 또렷이 보이는 나이 든 지금의 얼굴과 닮은 듯 전혀 다른 사진 속 그녀를 한참 들여다 보았다. 엄마가 아닌 듯 엄마인 그녀. 내가 보지 못한, 만나지 못한 엄마였지만,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영영 알 수 없는 어떤 사람도 거기에 있다는 사실에 쓸쓸했다.  



반 백의 시간 너머,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엄마의 기분은 어땠을까. 잃어버린 청춘이 아쉽고 안타깝기만 했을까. 사진 속 자신이 낯설어질 만큼 늙어버린 현실이 한스러웠을까. 그런 시절도 있었다는 게 쓸쓸하면서도 기쁘고, 그리워서 아쉬웠을까. 엄마는 종종 지금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이 정도면 잘 산 거라고, 지금이 좋다고 말하곤 했다. 어쩌면 엄마도,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닐까. 후회가 없지 않겠지만, 살아온 삶이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음을 받아들인 거라고.  



지금도 시간은 부족한 듯, 최선인 듯 흘러간다. 매 순간 최선일 수 없고, 모든 일에 최악일 수도 없겠지. 그럭저럭 괜찮은 정도면 충분한지도 모르겠고. 얼마 후면 그리움에 가득 차 오늘을 떠올릴 테지만, 그런 각성을 해도 당장 크게 바뀌는 건 없다. 하루만 사는 사람처럼 지나치게 애를 쓰다가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고, 내일만 바라며 오늘을 허비하거나 과거에 사로잡혀 오늘을 놓치는 것도 어리석은 일. 대부분의 날은 간신히 견디면서 계산하지 않은 기쁨과 우연한 즐거움이 다가오길 기다린다. 무사한 하루면 괜찮다고. 그렇게 괜찮은 날들이 쌓여 좋은 시절로 기억되는지도 모른다고. 간신히 지나온 시간과 그럭저럭인 날들이 모여 잘 살아낸 인상이 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내하며 보내는 지금의 의미를 당장엔 알 수 없다. 지나고 나야 그 시절, 그날, 그 시간에 대해 뭐라고 말하거나 쓸 수 있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살아가는 수 밖에. 이것저것 재고 따지고 생각하기보다 몸이 아는 대로, 익숙한 대로 살아가게 두는 게 맞을 수도 있겠다. 지나온 시간의 마디를 간직하고 있다면 몸은 자연스레 답을 찾아갈 것이다. 겪어낸 자국들 빼곡히 담긴 나의 몸이 내게 맞는 삶, 내게 어울리는 생활로 인도하고 있을 것이다. 



물놀이에 피곤했는지, 아이가 곤히 낮잠에 빠진 날이었다. 한 시간 즈음 잤을까. 잠결에 눈을 떠 기지개를 켜는 아이를 끌어안아 무릎 위에 눕혔다. 무릎을 배고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드는 아이의 말간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좋은 엄마 말고 나 다운 엄마가 되자. 좋은 아이 말고 너 다운 아이가 되렴. 너 다운 삶을 살렴.’



나 다운 삶, 그것만으로 인생은 꽤 괜찮지 않을까. 멋진 삶, 좋은 삶이 아니더라도 딱 나 다운 삶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나 다운 엄마라니, 이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홀가분했다. ‘좋은 엄마’가 되려고 애쓰느라 울상이 되었던 저녁들을 아니까. 남들이 말하는 ‘좋은 엄마’가 나와 아이에겐 좋지 않은 경우도 있었으니까. 그 말이 삶에 드리웠던 은근한 무게가 단번에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일까. 아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도 모르게 얼굴 가득 웃음이 번졌다. 나답게 한껏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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