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희망하는 사람

아이와 함께 자라는 엄마

by 춤추는바람





말복을 지났지만 여전히 한낮의 더위는 무겁고 요란하다. 코로나 19 감염병의 유행으로 아이는 어린이집에 못 간 지 한 달이 넘었다. 어린이집이나 학교를 가지 못한 채, 여름 방학을 맞은 아이들이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이들의 끼니를 챙기고, 공부와 놀이까지 보살피며 엄마들은 고군분투한다. 방학과 여름을 마음껏 즐기지 못하는 아이들이 안타깝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집에서 아이들과 온종일 씨름해야 하는 엄마들의 고충도 크다. 누적된 피로에, 고립감과 외로움이 쌓인다. 거기에 더위까지, 한 몫을 더한다. 그런데도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만의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버티고 있다. 일상이 회복되길 바라면서, 아이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는 날을 간절히 꿈꾸면서. 감염병의 종식은 요원해 보이고, 환경오염으로 인한 기후 재난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지금, 미래는 암울하다고들 말하지만, 그 미래가 아이들이 살아갈 시간이기에 엄마들은 절대 희망을 놓을 수 없다.


아이와 함께 있으면 가능한 아이에게 맞춰주게 된다. 그러지 않을 때 오히려 힘들고 번거로운 일이 생기기 일쑤이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걸 포기하는 게 차라리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한다는 걸 경험해왔다. 괜한 일을 벌이느니 그냥 조용히 하루를 보내자 싶다. 그러는 사이 ‘나’라는 존재는 희미해진다. 아이의 수발을 드는 ‘엄마’만 남고 ‘나’라는 개별자는 옅어진다. 하지만 이 존재 또한 욕구가 있고, 그게 해소되어야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 억누른다고 해소되는 게 아니다. 결국엔 부정적인 방식으로 분출되고야 만다. 그러니 아이와의 공존을 위해서라도 ‘나’의 욕구는 적절히 해소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디에도 아이를 맡길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아이와 어른이라는 시소가 아이 쪽으로 한참 기울어져 불균형을 이룬 채 멈춰 있다.


아이와 어른의 생활이 평화와 조화 속에 공존하는 삶은 불가능한 것일까. 아이의 요구는 어디까지 받아줘야 할까. 부모는 어디까지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 할까. 육아라는 끝없는 과제를 받아 들고 자주 질문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되묻기도 한다. 이런 생각이 잘못된 건 아닐까, 아이는 무엇도 요구하지 않고, 부모는 무엇도 포기할 필요가 없는 건 아닐까. 다만 그 방법을 몰라 이렇게 헤매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답 없는 질문을 반복하는 일에 전혀 성과가 없는 건 아니다. 홀로 묻고 답하고, 때론 타인의 조언에 귀 기울이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과제, 육아를 지속하는 사이 마음에 가느다란 근육이 만들어진 것도 같다.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걸 찾고 이해해보려 애쓴다. 조금 더 섬세하게 아이와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살핀다. 희망이라는 실체도 없는 풍선 하나를 가슴에 품는다. 그리고 절대 바람이 빠지지 않게 힘을 모은다. 마음에 생긴 근육은 가느다랗지만 결코 끊어지지 않는 강인함을 지니고 있다.


코로나 19 감염병으로 어쩔 수 없이 가정 보육을 하면서, 아이와 보내는 긴 시간이 즐겁기만 할 수 없다는 걸 다시 깨닫는다(작년 여름도 정확히 이런 모습이었다). 하루를 간신히 마감한다. 밤마다 숨이 턱 끝까지 차 오를 때도 많다. 그런데 여전히 버텨야 할 날은 많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런 하루 속에도 순간은 놀랍게 반짝이며 우리를 스쳐간다. 아이와 깔깔깔, 간이 풀장에서 발을 구르며 물을 튀겼던 순간,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 구름이 지나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그네를 탔던 순간, 나뭇잎을 휘감고 온 바람이 우리를 쓸어주던 순간, 여름의 고운 향만 담고 있는 복숭아를 나누어 먹던 순간. 터져 나오려던 한숨을 웃음으로 뒤바꾼 순간이 하루를 지탱하게 한다. 내일도 그런 순간이 우리를 구원해줄 거라 믿으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모든 상황이 절망적으로 다가올지라도 엄마라는 존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희망할 수 있어야 하니까. 우리가 마주할 내일이 아이가 날개를 펼칠 오늘이 될 테니까.








조예은의 소설 <스노볼 드라이브>에는 녹지 않는 눈이 쌓여 디스토피아가 된 세상이 그려진다. 눈은 피부병과 폐질환을 일으킨다. 사람들은 방호복을 입고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그런 속에서 모루와 이월은 제대로 배우고 경험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버렸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눈 폐기장에서 일하던 엄마가 폐질환으로 죽음을 앞두고 모루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다. “사랑한다.”, “어떻게든 살아가라.” 눈 속에 갇혀버린 일상, 기대할 게 보이지 않는 삶을 앞에 두고 자식에게 “어떻게든 살아가라”라고 말하는 엄마의 마음속에는 어떤 희망이 있는 걸까. 디스토피아에서도 살아가는 것이 가치 있다고 믿는 그 마음이 경이로웠다. 세상이 비극으로 펼쳐지더라도 살아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삶을 믿는 용기는 어디서 나올지 궁금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이 온다면, 나도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해주고 싶었다. “어떻게든 살아가라.”


엄마의 말이 주문처럼 모루를 살아가게 한지도 모르겠다. 소설에서 모루와 이월은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타인과 연결되길 바라고, 누군가를 기다리며 앞으로 나아가니까. 끝이 보이지 않는 설원 속으로 두려움 없이 발을 내딛으니까. 마지막까지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서로가 내어주는 작은 용기와 사랑이라고 소설은 말하는 것 같았다.


감염병의 창궐과 환경오염으로 인한 기후 재난이라는 상황 속에서 ‘녹지 않는 눈으로 덮인 디스토피아’는 머지않은 미래처럼 다가온다. 그런 미래가 오지 않길 바라며, 지금의 힘겨운 날들을 버티며, 매일 조금씩 나만의 용기와 사랑을 내어본다. 가능한 에어컨 사용을 줄이고, 택배 주문을 최소화하는 것, 쓰레기를 줄이고 분리배출을 잘하는 정도가 최선의 용기이지만. 조금이라도 웃을 일을 만들어 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지만. 그만큼의 용기와 사랑으로 내일을 향한 징검다리에 조약돌을 보탠다. 버티며 기다린다. 어떤 기다림은 희망이다.


오늘은 일 년에 한 번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칠석이다. 칠석이면 까치와 까마귀가 은하수 위에 오작교를 놓아준다고 했다. 만남을 바라는 두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까치와 까마귀가 자신들의 몸을 내어주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을까. 폭염과 마스크, 단절된 삶 속에서 모두가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자유롭게 산책을 하고 여름이 지나가는 자리에 남은 짙은 향을 마음껏 들이마실 수 있길, 그리운 이들을 만나 긴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길, 우리의 바람도 간절하다. 까치와 까마귀가 놓아준 오작교처럼 우리에게도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길 기다린다. 기다림이라는 희망에 바람을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