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외롭지 않겠다

내게로 가는 산책

by 춤추는바람






유난히 몸이 쳐지는 날이 있다. 어제가 그랬다. 아침부터 기분이 울적했고 사소한 일에 짜증이 솟았다. 아랫배는 찌르르하며 아펐고 더위에 몸이 늘어졌다. 그냥 누워서 맘에 드는 책이나 읽었으면 싶지만, 아이가 가만 놔둘 리가 없다. 누우면 일어나라고 할 테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놀자고 칭얼거릴 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늘은 엄마가 몸이 아파,라고 말해보았지만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아이는 소파 위에 있는 쿠션을 죄다 끌어다 바닥에 늘어놓고 베개를 가져와 탑을 쌓았다. 이불을 가져와 천막처럼 그 위에 드리워보려 했는데 뜻대로 안 되는지 자꾸 엄마를 찾았다. 내가 살아내야 할 오늘치의 역할을 누군가 대신해주었으면 싶었다.


끼니를 챙기는 것마저 귀찮아지는 날, 아이 때문에 밥을 건너뛸 수도 없으니, 상을 차리고, 먹고, 치우는 게 또 일이었다.


축축 쳐지는 내 마음과 아이를 달래며 그림을 그려 보기로 했다. 아이도 나도, 잠시 물감을 찍어 하얀 캔버스에 붓으로 색을 입히는 일에 몰두했다. 거친 숨결이 잔잔해지고, 복잡해지던 심경도 느슨해졌다. 조금 살 것 같다 생각했다. 그것도 잠시, 금세 작은 캔버스 두 개를 가득 채워 그림을 완성한 아이가 자기는 그만 하겠다고 화장실로 갔다. 손을 씻고 이리저리 분주히 오가는 것 같았다. 어! 물감이 묻었네, 하는 말에 고개를 드니, 어느새 하얗고 나풀거리를 블라우스로 갈아입은 아이가 심둥한 얼굴로 서 있었다. 오른편 겨드랑이 부근에 초록색과 오렌지색의 물감이 선명하게 묻어 있었다. 옷에 묻으면 지워지지 않는 물감이라 집에서 입는 편안한 원피스를 입혀 두었는데,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걸까. 옷은 왜 갈아입었어! 이 물감은 안 지워진다고 몇 번을 말했어!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이에게 유화 물감을 쓰게 한 내가 잘못했지. 그런다고 옷마다 죄다 물감을 묻히고. 아이야 당연히 흘릴 수밖에 없는데 그걸 혼내고. 에휴, 다 내 탓이지, 내 탓. 한숨이 푹푹 쏟아졌다. 물감이 묻은 아이 옷을 처리하고, 그림 그린다고 펼쳐 놓은 것을 정리했다. 온갖 질책이 마음속을 오갔고, 혼자 풍랑에 휩쓸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좌초해버리고 만 배처럼, 너덜너덜해진 채 인적 없는 해변에 버려진 배처럼, 더위가 짓누르는 집안에 쳐 박혀 있는 것 같았다.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그냥 멍하니 앉아 있고 싶었다. 그런데도 어김없이 끼니 때는 돌아왔다. 이것만 해놓고 나가자며 나를 다독였다. 이것만 다 하면 여기서 나가자고, 더위가 들끓으며 숨통을 조여 오는 이 집에서 나가버리자고.


야채를 다져 볶음밥을 만들고, 낮에 사둔 옥수수를 쪘다. 옥수수가 삶아지는 사이 재빨리 거실 바닥의 먼지를 쓸고, 어수선한 집안을 정리했다.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흘렀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집안이 정돈되고, 해야 할 일이 마무리될수록 홀가분해지는 느낌. 땀을 흘려 개운해진 몸처럼, 마음도 조금 말끔해졌다.


해 질 녘 아이 손을 잡고 공원으로 나갔다. 해가 기울어도 집 안엔 열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였는데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선선하게 휘돌고 있었다. 확 트인 잔디밭 앞에 서니 답답하게 조이던 것들이 확 풀어져 나갔다. 아이와 그 주변을 돌며 달리기 시합을 했다. 놀이터에 들러 깡총깡총 뜀뛰기를 하고, 숨바꼭질도 했다. 하루 동안 뾰족하게 돋아 있던 신경이 둥그렇게 몸을 말았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 친구들과 어울려 장난을 치는 여중생들, 어떤 시름 걱정도 없이 해맑게 놀이에 빠져 있는 아이들,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어르신들……. 구름은 느슨하게 풀어져 흐르고, 푸른빛이 회색으로 어두워지는 하늘에 저녁 해는 옅은 살구 빛을 남기며 사라지고 있었다. 가슴속에서 울컥,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바람이 넘나들며 맹렬했던 한낮의 더위를 가라앉혔다. 사람들은 아주 가깝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멀지 않은 거리에서 해거름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혼자 버려졌다고 느꼈었다. 하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따로 또 같이, 이렇게 함께 살아내며 버티었다.


이해받지 못해 외로웠다. 몸이 힘들고 마음이 고된 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 더 그랬다. 그런데 바람이 나를 쓰다듬어주었다. 하늘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각자가 견뎌냈을 무수한 하루 속에 내 것이 있을 뿐이다. 유별하지도 않고, 어떤 면에선 차라리 나았다. 저녁의 넉넉함이 사람들을 위로하며 우리 사이를 지나갔다.




“날씨가 좋다. 햇빛을 즐긴다. 함부로 외롭지 않겠다.

오래전 노트에 적었던 말이다. 펼치는 순간, 그 시절의 날씨와 햇빛과 호의가 함께 건너온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정말 날씨가 좋다. 더는 함부로 외롭지 않겠다.”

122쪽, <몽 카페> 신유진, 시간의 흐름




책에서 보았던 문장이 입 속에서 맴돌았다. 나는 나를 함부로 외롭게 했구나. 집이라는 곳에 나를 가두고, 외로움 속에 밀어 넣었구나. 한 발만 나서면, 이 시간을 견뎌내는 다른 이들을 만날 수 있고, 한 뼘만 문을 열면 바람과 하늘, 아이들의 웃음과 잠자리의 날갯짓을 품을 수 있는데 말이다.


어둠이 스미는 하늘이 높았다. 저녁 바람을 즐겼다. 더는 함부로 외롭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