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자라는 엄마
어린이 집에서 나온 아이가 친구와 깡충깡충 뛰면서 달려 나갔다. 다섯 살 꼬맹이들이 가방을 메고 신나게 달려가는 모습이 귀여웠다. 벌써 엄마보다 친구가 더 좋은 나이가 된 걸까. 뒤도 안 돌아보고 둘이서 놀이터로 향했다. 잠시 후 또 한 친구가 할아버지와 함께 도착했다. 요즘은 놀이터에서 셋이 논다.
둘일 때 생기던 공백이 셋이 되면서 사라졌다. 매 순간 시끌벅적하다. 누군가 한마디 하며 앞다퉈 말을 보탠다. 우리 언니는 맨날 공부만 해, 우리 언니는 나중에 혼자 살 거래, 우리 엄마는 밤에 컴퓨터만 해, 우리 할머니는 늦게까지 텔레비전만 봐, 우리 엄마는……. 셋이 돌아가면서 뱉어내는 말에 귀가 따갑다가도 배꼽을 잡고 웃었다. 어머, 얘들이 모르는 게 없네. 집에서 있었던 사소한 일들이 아이들 입에서 투명하게 흘러나왔다. 악의도 없고 비난조도 아닌데 어떤 말에는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뭘 알겠어 싶었는데, 아이들은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었다.
하원한 아이를 데리고 근처 놀이터에 도착하는 시간은 오후 3시 반 즈음이다. 나뭇가지 끝에 걸린 가을 해가 놀이터에 햇살을 드리웠다. 그네에서 시소, 시소에서 미끄럼틀, 놀이 기구를 오가며 뛰어노는 사이 아이들 이마에는 땀이 송송 맺혔다. 잎을 떨궈내 헐거워진 나뭇가지 사이로, 차가운 기운이 서서히 스미는 늦은 오후의 공기 속으로 꺄르르르르, 꺄르르르르, 아이들의 웃음이 번져 나갔다. 놀이터 가장자리에 놓인 벤치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물끄러미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몸에서 번져 나오는 생기를 가을 햇살인 듯 들이켜는 것 같다. 아이들이 퍼뜨리는 생명의 기운은 사그라드는 계절에 위로처럼 다가왔다.
아이가 가방을 열어 종이비행기를 꺼냈다. 그 속을 들여다보니 종이비행기만 대여섯 개가 들어 있다. 세 개를 꺼내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더니 비행기를 날리자고 했다. 비행기를 하나씩 손에 쥔 아이들이 날다람쥐처럼 달려갔다. 미끄럼틀이 달린 목조 구조물(정글짐)로 올라가 난간에 서서 하늘을 향해 비행기를 던졌다. 하얀 종이비행기가 허공에서 햇빛을 받고 잠시 반짝이다 모래밭으로 떨어졌다. 어느새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온 아이들이 바닥에 떨어진 비행기를 주워 들고 정글짐을 올랐다. 서아야, 예슬아, 서윤아, 서로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 가끔씩 터지는 웃음소리, 신이 나서 한 톤 높아진 목소리, 아이들은 자기들만의 완벽한 세상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친구, 그 이름 하나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벅차오르던 때가 있었다. 친구를 만나면 가슴이 터질 듯 기쁘고, 함께 있으면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헤어지기 싫어 엄마를 졸라 친구네 집에서 자기도 했고,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 골목 어귀에 앉아 밤이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좋아하는 노래를 테이프의 앞 뒷면에 빼곡히 담아 선물했고, 일기장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편지를 썼다. 매일 만나도 늘 보고 싶었고, 아침마다 설레며 학교를 갔다. 내 인생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살았던 시절, 친구는 ‘온 세상’을 의미했다.
미끄럼틀에서 내려온 아이들이 놀이터 주변을 돌며 돌멩이를 줍고 나뭇잎을 모았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빨간 열매를 따 달라고 아우성쳤고 작은 봉투에 수집한 것들을 소중하게 담아 움켜쥐었다. 혼자가 아니라 더 재밌고 셋이 함께라서 대단한 놀이가 되었다. ‘친구’라는 신나고 재미난, 가슴 뭉클하고 아름다운 세계로 아이들은 걸어 들어가고 있다. 미치도록 행복하지만 시기와 질투, 서운함과 원망으로 지독한 슬픔을 안겨 주기도 할 세상이다. 나와 다른 세계를 거침없이 받아들이면서 타인을 이해하고 서로를 아껴주는 법을 배우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 상처 입고 실망도 하겠지만 그것까지 끌어안으며 함께 성장할 테지. 살아가는 일의 기쁨과 슬픔은 누군가와 나눌 때 더 커지기도 줄어들기도 하면서 삶을 풍성하게 만든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덩치는 제일 큰데도 행동이 느리지만 자기주장이 강한 예슬이, 마른 체구에 몸놀림은 잽싸지만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서아, 두 명의 중간 정도에 있는 서윤이. 생김도 다르고 성격도 제각각인 아이들이 허물없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의 이치가 그 속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된다. 나와 다른 타인을 받아들이면서 부족한 것을 메우고 넘치는 것을 보태주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거라고.
서아야, 예슬아, 서윤아, 아이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 나갔다. 뛰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 위로 지나간 시간이 떠올랐다.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뛰어놀던 날들,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오갔던 길, 고운 편지지 위에 정성 들여 적어 내려갔던 이름들, 지금도 힘들 때면 가슴속에서 꺼내보는 얼굴들. 뒤에 서서 바라볼 때 선명해지는 의미가 있다. 아이들은 앞으로 달려 나갔지만 미래를 볼 순 없었다. 아이들은 현재라는 순간에 온전히 녹아들어 있을 뿐이니까. 대신 아이들의 그림자 속에 스며든 나의 지난 시간에 정성껏 이름을 붙여줄 수 있었다. 아이들 덕분에 어른은 두 번을 사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