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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Oct 07. 2021

관계의 기본은 돌봄

온전한 나로 존재하는 법




보이지 않고 느끼지 못하는 미세한 돌봄이 일상을 지탱해준다. 불완전한 나는 세상의 많은 것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보낸다.  



가을비가 그치고 공기가 차가워졌다. 언젠가 사 먹었던 붕어빵 생각이 나 아이와 함께 좀 멀리까지 걸어 나갔다. 뜨거운 김에 단내가 폴폴 올라오는 붕어빵 봉지를 들고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버스를 타기로 했다. 세 정거장 밖에 안되지만 언덕이라 아이의 걸음으로는 버겁기도 한 여정이니까. 



붕어빵 봉지에서 번지는 냄새가 신경 쓰였지만 금방 내릴 테니까 하는 마음으로 창문이 열린 자리에 앉았다. 언덕을 힘차게 오르는 버스의 흔들림이 느껴질 즈음 문득 낮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 곁에 있는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말하느라 아이 쪽으로 몸을 기울였고 그러느라 창 밖이 보이지 않았다. 잠깐이라 생각했는데, 이야기에 빠져 있는 사이 버스는 한참 달린 걸까. 아이가 갑자기 놀란 듯 “어, 어!” 외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헐레벌떡 벨을 누르는 순간 버스는 이미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쳤다. 그나마 한 정거장밖에 지나지 않아 다행이었달까. 뭔가 알아챈 아이가 창 밖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면 버스를 타고 하염없이 가고 있었을지 모르니까. 어이없는 나의 실수에 버스에서 내려 크게 숨을 내쉬었다. “네 덕분이었어.” 라고 아이에게 말했다. 어느새 우리가 서로를 돌보는 사이가 되었구나 생각하면서. 엄마만 아이를 돌보는게 아니라 작은 아이도 엄마를 돌보는 그런 사이. 



이근화 시인의 산문집 <아주 작은 인간들이 말할 때>(마음산책)에서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삶을 읽었다. 일찍이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아 연주자의 삶을 살았던 마르타는, 이른 나이에 결혼해 아이를 낳았지만 이혼했고, 첫째 딸 리다는 보육원에서 키워지는 최악의 상황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천재적인 예술가였던 그녀는 자유로운 삶을 지향했고, 두 번째 결혼에서 아니를, 세 번째 남자 친구와의 사이에선 스테파니를 낳았다. 



그녀는 유명하고 바빴기 때문에 아이들은 타인의 손을 빌어 키울 수밖에 없었다. 둘째 딸 아니는 마르타에 대해 ‘내가 돌봐야 하는 아이’였다고 기억했고, 셋째 딸 스테파니는 밤늦게까지 연습하는 마르타의 피아노 아래서 잠들고는 했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그런데도 성인이 된 딸들은 엄마에 대한 원망이나 유년 시절에 대한 슬픔 없이 자신의 삶을 꾸려 가는 듯했다.



엄마라는 관념 속에 응당 포함되는 인내와 희생의 역할을 마르타는 하지 않았지만 딸들은 그런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엄마라 부르는 데 거리낌이 없다. 그래서인지 마르타와 세 딸의 관계는 가까운 친구 사이와 비슷해 보였다고 시인은 썼다. 엄마의 일방적인 돌봄과 배려가 아닌 엄마와 딸들이 서로를 돌보며 챙겨주는 사이라고. 그런 관계가 가능하다는 게 처음엔 충격적이면서 신선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부모와 그런 관계를 만들어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어린이집에서 하원하고 공원 놀이터에 들러 놀이를 하는 일과 후에는 엄마를 위해 조금만 공원을 걸어 달라고 아이에게 부탁한다. 그러면 아이는 대신에, 하면서 단서를 붙인다. 오늘은 집에 돌아가서 그림책 두 권을 읽어주는 것으로 합의했는데, 문득 장난기가 발동해 그러면 엄마도 또 무언가를 부탁할 거야 라고 했더니, “안 그래도 내가 해주는 게 있잖아” 하며 아이가 자신이 하는 일을 늘어놓았다. 밥 먹고 그릇을 싱크대에 넣거나 잠자기 전에 물을 떠다 주거나……. 그러게 말이다, 이미 우린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서로를 배려하고 돌보며 살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긴 시간 온전히 아이를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아이가 어릴 때엔 엄마인 내가 먹이고 재우고 씻기는 총체적인 돌봄을 떠맡아야 했지만 아이 또한 아이 나름대로 내게 늘 무언가를 내어주었으니까. 티 없이 맑은 웃음과 더없이 사랑스러운 옹알이로, 어디서도 만져볼 수 없던 보드라운 살결과 생명이 지닌 유일한 온기로, 안온함이라는 정서적 돌봄을 베풀었다. 아이를 안고 있으면 나를 안고 있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아이를 위해 가장 많이 희생해야 했던 시절, 오히려 가장 큰 사랑을 아이로부터 받았다.



아이가 자라 말을 하게 되면서 ‘사랑해’, ‘엄마가 좋아’처럼 나를 지지해주고 긍정해주는 말을 날마다 듣는다. 아이의 포옹과 쓰다듬어 주는 손길로 사랑을 받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돌봄이 있을까. 마음으로 받는 돌봄이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평온과 안도의 근원을 채워준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받는 일은 그의 마음에 공들여 집 하나 짓는 일 같다. 그럴 수 있다면 어떤 날에도 끝까지 외롭지는 않을 것 같고. 엄마로 일방적인 돌봄을 주던 시간에도 나와 아이는 서로의 마음에 작지만 영원히 허물지 않을 집 하나를 단단하게 세워왔던 게 아닐까. 



어린 시절 전적으로 부모의 돌봄에 의지하다 가도 부모가 나이 들어 병들고 허약해지면 자식들이 부모를 돌보는 때가 온다. 젊은 시절에도 질병이나 사고를 겪으면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수적이고. 누구도 돌봄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우리는 서로를 보살피는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돌봄을 주고받는 시기에 격차가 있을 뿐. 일방적으로 돌봄을 주기만 하거나 받기만 하는 관계는 생각만으로 숨이 막힌다. 관계의 양상은 언제든 바뀔 수 있고, 예기치 않게 끝나기도 한다. 돌봄은 시시각각 그 방향을 바꾸며 오가기 때문에, 관계에 지치다 가도 다시 힘을 얻고 실망하다 가도 기대를 걸어 보는 게 아닐까.   



모든 관계는 돌봄을 기본으로 한다. 인간이 지닌 의존성과 불완전함은 돌봄을 필요로 한다. 의존성을 부정하는 대신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서로에게 더 잘 의존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잘’은 ‘많이’와 같은 양적 개념이 아니라 상대에게 부담을 지우거나 상처주지 않으면서 기꺼이 돌봄을 나눌 수 있는 ‘바람직한’의 의미면 좋겠고.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걸 기억하면 날마다 미세한 돌봄 속에 있음을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타와 세 딸의 관계가 유별해 보였는데 한 발 떨어져 세상을 바라보니 모든 관계가 크기와 모양만 다를 뿐 유사한 패턴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 늦은 밤 퇴근한 남편이 비 오는 궂은 날씨에도 재활용 쓰레기를 버려주고, 딸아이는 싱크대 앞에 의자를 가져다 귤을 씻어 내 앞에 놓아준다. 오늘도 서로의 돌봄 안에서 무탈하게 하루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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