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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Oct 12. 2021

아이를 통해 다시 열리는 문

아이와 함께 자라는 엄마


어느 날 아침, 나갈 채비를 하는데 딸아이가 작은 구슬 몇 개를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오늘 가서 친구들 나눠 줘.” 바빠서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고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잊어버렸다. 급한 일을 끝내고 나서야 그 생각이 나 주머니에 손을 넣어 꺼내 보았다.


모양은 다 다른데 색깔은 모두 연한 라벤더 색이었다. 다양한 모양의 색색깔 구슬이 들어 있는 통에서 아이가 나름대로 골라낸 것이다. 꽃 모양, 나비 모양, 홈이 파인 것, 길쭉한 것……. 늘 바닥에 떨어져 있어 청소할 때마다 귀찮게 여기던 구슬인데 손바닥 위에 모아 놓고 보니 예뻤다. 친구들 나눠주라던  말이 그제야 마음속에 메아리를 그렸다. 엄마 친구 이렇게 안 많은데, 일곱 개 씩이나 챙겨주었네. 신경 써서 골랐을 마음이 구슬 하나하나에서 만져질 것 같았다.


어린이집에 갈 준비를 하는 아침에 아이는 가끔 “뭐 나눠줄 거 없을까?”하고 묻는다. “어떤 거?”하고 되물으면 “젤리 같은 거.”라고 해 먹고 싶어 그러나 보다 모르는 척 넘어간 적이 많다. 그런데 그렇게 묻던 아이의 마음이 먹고 싶어서만은 아닐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 나누어 주라고 집에서 만든 쿠키를 포장해 주거나 자잘한 장난감을 챙겨 줄 때 무척 기뻐했으니까. 그러니 선물하는 즐거움을 알기 때문에 아침이면 친구들에게 나누어 줄 무언가를 찾았던 것 같다. 내게 작은 구슬을 쥐어 줄 때, 아이는 그 기쁨을 선물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선물(present)이라는 영어 단어에는 ‘현재 ‘있다라는 존재의 의미도 들어 있다. 그건 선물이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존재를 지금  순간 느끼게  주기 때문이라서 일까. 그러니 선물에서 중요한  물건이 아니라 거기 담긴 선한 마음일 테다. 당신이 건넨 마음이  마음을 두드리고,  마음을 담아 보내 당신의 마음을 흔들기도 하는 , 그래서 주고받는 것만으로 즐거운 . 작은 구슬과 손톱만  젤리로도 커다랗게 웃을  있는 아이들은 세상에 보내진 선물 같다.


잊고 사는 마음의 존재를 아이가 자주 일깨워준다. 아이가 무심코 건네는 말에 내 마음은 일렁거린다. 내 몸에 자신의 몸을 전적으로 맡기는 다정한 포옹과 따뜻한 손은 백 마디의 말보다 감동적일 때가 많다. 아이의 아주 작은 몸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과 매일의 삶을 긍정하는 힘찬 기운이 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웃는 게 일인 아이에게서 희망이라는 단어의 실체를 보는 것 같다. 그러니 내겐 이 아이가 날마다 새롭게 받는 선물인 셈이다.


김영경의 그림책 <작은 꽃>에는 벽돌로 성을 쌓는데 몰두한 아이가 등장한다. 그러는 사이 아이의 몸집은 자라나 성에 꽉 차 버리고 만다. 어느 날 아주 작은 아이가 와서 성에 갇혀 있는 아이에게 노란 꽃 한 송이를 건네준다. 벽돌 쌓기 밖에 몰랐던 커다란 아이의 시선은 한참이 지나서야 꽃에 닿고, 천천히 작은 아이를 알아챈다. 작은 아이를 발견한 후로는 그 아이를 따라 다른 것들도 바라보면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성에서 벽돌만 쌓던 동안엔 몰랐던 기쁨을 만나면서 아이는 다시 작아진다. 커다랗던 아이의 몸은 작은 아이만큼 작아지고 둘은 세상의 아름다운 것을 만나는 여정을 지속해 나간다.⠀


이 책을 보면서 성을 쌓는데 몰두해 있는 커다란 아이가 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일과 해야 할 일, 밥하고 치울 생각, 아이를 씻기고 재울 생각에만 사로잡혀 소소한 기쁨을 알아채지 못하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나, 쫓기듯 허둥지둥 살아가는 재미없는 어른은 몸집만 커다래진 아이인지도 모른다. 커다란 아이에게 작은 아이가 노란 꽃을 건넸을 때, 아이는 벽돌을 쌓느라 꽃의 존재를 곧바로 알지 못했다. 나도 그랬다. 딸아이가 내게 전하는 다정한 메시지를 놓쳐버리거나 뒤늦게 발견하는 때가 많았다. 어른의 세계에 익숙해져 바쁘다고 핑계를 둘러대느라 작은 세계를 보는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커다란 아이는 나 같고, 꽃을 건네는 작은 아이는 어린 딸 같았다. 아이가 손에 쥐어 준 작은 구슬을 주머니 속에 넣어둔 채 잊어버렸던 것처럼, 다시 꺼내 들여다본 후에야 그 속에 담긴 마음을 알아챌 수 있었던 것처럼. 소중히 모아 쥐고 싶고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은 작고 아름다운 세계가 있다는 걸 아이 덕분에 깨닫는다. 아이를 통해 열리는 작은 문을 발견한 것 같다.    


그림책 <작은 꽃>에서 다시 작아진 아이는 친구와 함께 둘에게 어울리는 집을 짓고 나무를 기르며 밤하늘의 별과 달을 바라본다. 혼자 성만 쌓고 있던 때보다 아름답고 즐거운 일이 많아진다.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아이의 모습에 나와 딸아이를 포개어본다. 아이 곁에 앉아 아이가 바라보는 작은 세계로 시선을 돌리고 싶다. 그러면 오래전 잃어버렸거나 수시로 놓치고 마는 작고 빛나는 것을 다시 만나게 되지 않을까.  


구슬 선물을 받은 다음날, 아이에게도 선물할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아이가 엄마 친구에게 줄 선물을 골라준 것처럼. 집에 있는 젤리를 비닐팩에 나누어 담아주었다. 그런 날 보고 즐거워진 아이가 반 친구들이 몇 명인지 어설프게 헤아리기 시작했다. “음… 한 명, 두 명, 세 명, 네 명…… 여자 친구가 다섯 명, 남자 친구가 일곱 명.” 젤리 선물이 담긴 작은 가방을 들고 아이는 두 눈을 빛내며 집을 나섰다. 어린이집을 가는 내내 선물 줄 생각에 설레었겠지. 좋아할 친구들 생각에 마음이 간질간질했겠지. 그걸 상상하는 사이 내 마음도 말랑말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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