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될 거예요

아이와 함께 자라는 엄마

by 춤추는바람




새해가 밝았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19로 예년처럼 친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만남은 가질 수 없었지만 가족들끼리 모여 식사를 하고 덕담을 나누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께 세배를 하고 세뱃돈을 받았다. 할아버지께서 새해에는 소원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말씀 뒤에 새해 계획이 뭐냐고 물으셨다. 5학년이 되는 조카는 “엄마와 약속한 것을 잘 지킬 거예요.”라고 답했다. 오늘로 여섯 살이 된 우리 아이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꽃이 될 거예요.”



곁에 있던 사촌 언니가 “어떻게 꽃이 돼요?”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어린 동생의 답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이의 엉뚱한 답을 모두가 웃어넘겼다. 내심 기대했던 답이 있던 나도 조금 당혹스러웠다. 전날 밤 새해가 되면 여섯 살이 된다는 이야기를 나누다 아이가 불쑥 “새해에는 화가가 될 거야!”라고 해서 그걸 말할 줄 알았으니까.



사람들은 꿈이나 소원, 계획이라는 말을 들으면 으레 현실에서 이룰 만한 가능성이 있는 것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지금 자신의 모습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고 가능성이 있어야 희망할 수 있다고 여긴다. 학생이라면 공부를 잘하길 바라고, 고3이라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길 소원하듯. 적당한 때가 되면 취업과 결혼을, 돈을 많이 벌거나 승진하는 일 따위를 새해 계획으로 삼는다. 우리 사회엔 꿈이나 계획도 정답처럼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지난밤 화가가 되겠다던 아이의 말도 뜻밖이긴 마찬가지였다. 평소 그림 그리는 걸 유난히 좋아하거나 눈에 띄게 잘 그리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 아이가 뜬금없이 내뱉는 말에 어리둥절했지만 그렇게 마음껏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좋았다. 아이들은 꿈도 두려움 없이 꾸는구나 싶었다. 주변의 시선이나 환경, 미래의 삶 따위에 갇혀 가능성에 한계를 긋지 않으니. 다시 생각해보니 꿈이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꿈’이라는 단어 속에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이라는 뜻과 함께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헛된 기대나 생각’이라는 의미가 있듯이 말이다.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지만, 그래서 조금 헛되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무모하게 마음에 품어 보는 게 꿈다운 꿈 아닐까. 꿈에서라도 어떤 한계나 조건도 짓지 않는 것, 그런 꿈을 꾸는 게 우리에겐 왜 어려운 걸까.



사람들은 조건을 따지고 가능성을 계산하며 꿈을 꾸는 법에만 익숙해진 것 같다. 나 또한 학업을 마치고 취업과 결혼까지, 사회적으로 주어진 역할을 통과하고 나서야 실현 가능성이라는 제약에서 벗어나 다른 꿈을 꿀 수 있었다. 그러니까 순전히 좋아서, 그저 해보고 싶어서 무언가를 시도해보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었던 건 꽤나 나중의 일이었다. 자주 ‘쓸데없이 시간 낭비한다’ 거나, ‘그걸 해서 뭐에 쓸 거냐’는 등의 시선을 의식했고, ‘이걸 할 수 있을까’ 하며 능력이나 자질을 의심하느라 섣불리 도전하지 못했던 것 같다. 소용과 목적을 떠나 무언가를 해보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전공이나 일과 전혀 상관없이 순전히 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배웠던 건 첼로와 드로잉, 베이킹과 도자기가 있다. 그중에는 조금 배우다 그만둔 것도 있고 꾸준히 계속하는 것도 있다.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된 것도, 그럴듯한 무언가가 된 것도 없지만 조금 엉뚱해 보이는 걸 배웠던 경험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마음먹으면 무엇이든 해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잘하고 못 하고 와 상관없이 즐기고 경험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반드시 어떤 성취가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도 버리게 되었다. 과정 자체로 즐거웠다면 그것만으로 가치는 충분했다. 익숙했던 세상 밖의 무언가로 팔을 뻗어보는 일, 조금 엉뚱한 꿈을 꾸어 보는 일은 길이 정해진 것처럼 보이는 삶의 지도에 눈에 띄지 않는 샛길을 그려 넣는 것 같았다. 목적지에 다다를 필요 없이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 즐거운 길도 인생에는 있는 법이다.



하지만 출산을 하고 육아에 매몰되면서 낯선 꿈이나 흥미로운 배움에 대한 생각이 사라졌다. 평소 좋아했던 것과 즐기던 것조차 희미해져 있었다. 집과 아이만 보고 사는 사이 몇 년이 흘렀고 생활 반경이 줄어든 만큼 시야가 좁아졌다. 무엇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이나 에너지 같은 게 사라졌다. 거기서 오는 답답함이 책을 읽고 글을 쓰게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작년 즈음엔 색다른 꿈을 품어볼 수 있었다. 작년 나의 새해 다짐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세상은 넓고 다양한 사람들과 생명체가 어우러져 갖가지 삶의 패턴을 만들어내고 있을 텐데 어느새 보는 것만 보고 익숙하고 안전한 길만 택하여 걷고 있었다. 그러느라 눈앞에 존재하는데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게 된 게 많았다. 같은 책을 읽고 모두가 알아채는 당연한 사실을 놓치는 때도 있었으니까. 어느새 보고 싶은 대로만, 생각해왔던 방식대로만 살고 있었다. 아이와 집에만 있는 사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마저 안정과 익숙함이라는 틀 속에 갇혀 버린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글쓰기였다. 쓴다는 것은 다시 한번 돌아보고 그러면서 질문하고 나만의 답을 찾는 일이다. 글을 쓰기 위해 생각의 시간을 갖는 사이 알지 못했던 나와 보이지 않았던 타인과 세상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잊어버렸던 과거가 선명하게 떠올랐고 알 수 없던 미래가 예감처럼 흘러들어왔다. 글을 쓰다 보면 평소 보이지 않던 게 보였고, 신경 쓰지 않았던 일이 궁금해졌다.



새해 첫날 세웠던 바람이 은연중에 삶을 이끌었던 한 해를 보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가벼이 흘려보내던 일상의 순간에 깊고 세심하게 반응하게 해 주었다. 매일 글을 쓰는 모임에 가입했고 새벽 기상을 실행하며 글을 썼다. 쓰기 위해 순간에 더 오래 머물렀고 생각을 길게 곱씹어보았다. 그러자 의미 없이 흘러가버리던 삶이 머물며 흔적을 남겼다. 자주 앞서 달려가 사라져 버리곤 하던 삶이 내 곁에서 나란히 걸어주는 것 같았다. 글을 쓰면서 내 삶은 달라졌다.



꽃이 되고 싶다는 아이의 바람은 한 차원을 더 벗어나 있는 것 같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그런 계획이나 꿈을 갖고 싶다. 엉뚱하고 터무니없지만 아름다운 꿈. 새해에는 모두가 그런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대박 나세요, 부자 되세요, 같은 뻔한 꿈 말고, 생각만 해도 큭큭 웃음이 터져 나오거나 마음이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는 그런 꿈. 꿈은 때로 삶의 방향키를 미세하게 바꾸어 놓기도 한다. 아주 약간 방향을 틀어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하겠지만 시간이 지나 보면 뜻밖의 곳을 향해 꽤나 멀리 나아갔음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처음 글쓰기를 시작할 때엔 이렇게 오랫동안 쓰게 될 줄 짐작도 못했으니까. 새해에도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꿈이나 계획을 세워봐야겠다.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면 더욱 좋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