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자라는 엄마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재유행으로 아이가 어린이집을 가지 않은 지 두 달이 되어 간다. 온종일 아이와 붙어 있는 생활은 아슬아슬한 균형 잡기 같다. 어른의 시간과 아이의 시간 사이, 어른의 취향과 아이의 취향 사이를 오가며 어디까지 배려하고 어디엔 선을 그어야 할지 매 순간 고민한다. 가끔은 매일 새로 시작하는 영역 싸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집 거실에는 4인용 소파가 있고, 테이블 주변에는 의자가 여섯 개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제대로 앉을 수 있는 자리가 하나도 없다. 딸아이가 소파 앞으로 의자를 죄다 끌어 다 자기만의 집을 지었기 때문이다. 소파 앞에 의자를 줄지어 놓고 그 위에 스툴을 올려 담을 쌓았다. 안쪽으로는 가장자리를 따라 쿠션을 세우고 작은 담요를 깔고는 자기네 집이라고 소개했다. 그런 상태로 며칠이 흘렀다.
처음엔 아이가 혼자 간신히 앉아 있을 만한 크기였는데 어느새 누울 수 있을 정도로 넓어졌다. 한 번은 갑자기 집안이 조용해져 둘러보니 아이가 그 속에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엄마, 너무 아늑해 보이지 않아?" 하고 자랑하더니 안 자겠다고 고집부리던 낮잠 속으로 자발적으로 빠져들어 버렸네. 정말 아늑하긴 아늑한가 보다 싶어 웃음이 났다.
가족이 모두 모이는 주말, TV라도 보려고 소파 근처를 서성여도 아이는 자기 집이라며 양보하지 않았다. 나와 남편은 소파 모퉁이에 간신히 엉덩이를 붙인 상태로 TV를 보았고 밥을 먹을 때마다 의자를 내놓으라고 아이와 실랑이를 벌였다. 밤이면 제자리로 돌려놓으라고 꾸짖었고 아이는 속상해 눈물을 흘렸다. 그런 날이 반복되면서 나의 성화도 잦아들었다. 아이의 고집도 고집이지만, 어린이집을 갈 수 없고 놀이터에서 놀 수도 없는 아이에게 집이라도 내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
눈이 내리고 한파가 지속되면서 하루 종일 문 밖으로 한 번도 나서지 않는 날이 이어졌다. 아이는 매일 자기만의 집을 지었고 마음에 드는 인형이나 책, 장난감을 가지고 들어갔다. 나날이 그 집에 쌓이는 물건이 늘어갔다. 한숨이 나오다가도 집 안에서라도 아이가 놀이를 계속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질서를 잃고 용도가 무색해진 거실에 너그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의자와 이불, 쿠션과 베개가 뒤엉켜 있는 거실을 보면 심란한 마음을 어쩔 수 없지만, 언젠가 이 놀이도 끝이 날 것이다.
물건들은 본래의 자리를 잃었지만 기발하고 재미난 쓰임새를 찾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만의 집을 짓고 웃고 있는 아이처럼, 한 곳에 붙박여 있던 의자와 장롱에 잠들어 있던 담요들이 자리가 옮겨지고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아 즐거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20세기 독일어권 최고의 저술가이자 비평가, 사상가였던 발터 벤야민도 말하지 않았던가.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사물의 얼굴을 발견하고 그래서 어른의 세계 안에 자기들만의 작은 세계를 만들어 낸다고 말이다.
"폐기물에서 아이들은 사물의 세계가 바로 자신들을 향해,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보여주는 얼굴을 알아본다. 폐기물을 가지고 아이들은 어른의 작품을 모방하기보다는 아주 이질적인 재료들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놀이를 통해 그 재료들을 어떤 새롭고 비약적인 관계 안에 집어넣는다. 아이들은 이로써 자신들의 사물 세계, 즉 커다란 세계 안에 있는 작은 세계를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낸다."
(81쪽, '공사 현장' <일방통행로> 발터 벤야민 지음, 김영옥·윤미애·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다 쓴 휴지심이나 과자가 담겨 있던 종이 박스, 뽁뽁이 포장지와 종이백, 플라스틱 통이나 빈 캔은 아이의 수집품이다. 휴지심과 종이백에는 그림을 그리고 온갖 박스와 빈 깡통을 모아 집안에 있는 모든 필기구를 나누어 담아 놓는다. 수납장 속에 있던 물건을 꺼내 바닥에 늘어놓고 그 속을 자기 가방과 책으로 채우기도 하고, 그릇장에 있는 컵과 잔의 위치를 새롭게 바꿔 놓기도 한다. 이렇듯 원래 있던 자리에서 꺼내 물건을 재배치하고 다른 역할을 만들어주는 건 아이의 특기다.
내 방식대로 정리하고 거기에 익숙해진 눈은 아이가 바꿔 놓은 모습이 뒤죽박죽처럼 느껴진다. 엉망으로 뒤엉킨 것 같아 어지럽기도 한데 가끔은 기발한 상상력에 놀라고 뜻밖의 광경에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아이의 손을 거치면 이상하게 귀여운 구석이 생기니 정겹기까지 하다. 이게 뭐냐고 잔소리를 하면서도 은근슬쩍 아이가 만들어내는 작은 세계를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닐까. 못하게 막거나 당장 치워버리는 대신 모르는 척 눈을 감아주게 되는 건 한 발 양보하면 집 안이라는 평범한 곳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해 ‘자기만의 세상’이라는 멋진 무대를 지어낸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일 거다.
그러면서 생활에 바짝 조였던 나사가 하나씩 느슨해져 가는 것 같다. 거실을 어지럽힌 아이를 꾸짖는 대신 청소를 하루 건너뛰고, 소파를 차지하고 큰 소리로 노래 부르는 아이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대신 작은 방으로 피신해 책을 읽는다. 아이와 집에서 온종일을 보낼 수밖에 없는 요즘, 어른의 시선으로 쓸고 닦고 정돈하던 일상은 해이해졌지만 덕분에 상상력과 여유가 비어 들어올 틈이 생긴 것 같다. 그 상상력이 별거 없는 오늘에 즐거움을 건네고, 그 여유로 오늘의 불안과 스트레스를 잠재운다. 내 기준을 고집하기보단 나와 다른 아이의 시선을 이해해보면서, 완전해지려는 노력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려 시도하면서 아이와 내 생활의 균형점을 찾아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청도는 빼먹기로 한다. 아이의 상상력을 지켜주기 위해서라고 멋지게 변명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