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이름을 쓸 수 없었던 천재작가
영화팬치고 <로마의 휴일>을 보진 않았어도 모르는 사람은 많지않다고 생각한다. <트럼보>는 그 <로마의 휴일>을 쓴 시나리오 작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영화는 2015년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러 부문에서 노미네이션되었다. 에미에서 <브레이킹 배드>로 남우주연상을 탄 브라이언 크래스톤이 주연으로 트럼보 역할을 맡았다. 1940년대 당시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시나리오 극작가 달튼 트럼보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텐'은 공산주의라는 이유로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된다. 공산주의와의 냉전에 돌입하는 미국 사회에서 공산주의를 대변하는 일은 반역자로 몰리는 일이었고 당시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고 파산, 이혼, 심지어는 자살로 이어지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흑백논리가 사회 전체를 지배했던 시대였다. 미국에서는 '반미활동 조사위원회'가 조직되어 반공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영화 초반에 '할리우드 텐'이 주장하는 바가 나오는데, 국회는 국민의 투표와 종교와 사상과 발언, 영화 제작에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 골자이다. 이런 데 맞서 반미활동 조사위원회는 '공산주의의 할리우드 장악 음모'를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을 청문회로 소환한다. 트럼보를 비롯한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은 대법원이 진보측 판사가 많다는 이유로 대법원에 가면 승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증언을 거부하지만 일이 생각처럼 풀리지 않고 결국 트럼보와 알런을 비롯한 몇몇 작가들은 감옥을 가게된다. 이와중에 트럼보는 자신의 이름이 아닌 동료 작가인 이안 맥켈란 헌터의 이름으로 <로마의 휴일>을 스튜디오에 파는데 성공하고 이 작품은 결국 영화화된다.
트럼보는 감옥에서 출소한 후 일이 들어오지 않아 B급 영화사인 킹브라더스에 찾아간다. 세일즈맨 출신의 킹은 1200불이라는 헐값에 작품을 써주겠다는 트럼보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영화 제작을 한다. 트럼보는 돈이 되는 B급 영화 대본을 최대한 많이 쓰려고 한다. 자신의 이름은 영화계에서 매장당해 쓸 수 없기 때문에 가명을 사용하면서 자신의 본업인 글 쓰는 일을 계속해 나간다.
새로 이사간 동네에서도 이웃에게서 협박을 받고 온갖 괴롭힘을 당하지만 트럼보 가족은 그럴 때 일수록 뭉쳐서 시나리오 작업을 가업으로 해나간다.
로마의 휴일이 극장에서 개봉됐고, 트럼보는 자신의 이름이 걸려있지 않은 자신의 작품을 즐겁게 감상한다. 씁쓸한 마음이 있었겠지만 자신의 작품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만으로 족한 것이다. 트럼보는 동료 작가들에게도 일을 주면서 삶을 연명하게끔 도와준다.
트럼보는 돈 때문에 B급 영화들의 대본을 쓰고 있지만 동시에 대작을 쓸 아이디어와 욕구를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이안 맥켈런 헌터의 이름이 호명되고 <로마의 휴일>이 상을 타게 되는 순간, 트럼보는 거실에 앉아 가족들과 조촐히 기뻐할 수 밖에 없었다.
수천 명이 들떠서 환호했지만
셋만 그러지 못했어.
클레오와 나와 어떤 소년이 있었는데
그 아이는 앞에서 울고있었지.
그 이유가 늘 궁금했어.
트럼보는 동료 작가인 앨런과 의견차이로 싸우지만 자신이 하는 일이 결국 변화를 위한 승리의 발판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하루종일 글을 쓰느라 가족들과 멀어지고 심지어는 딸의 생일에 1분의 시간조차 못 내주고 화내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친구들 또한 잃고 그가 가족들을 잃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다시 가족품에 돌아가기 위해 다시 대화를 시도한다.
난 내 삶을 되찾고 싶었네.
그들은 모든 이름을 다 알고 있었네.
난 마침표만 찍었을 뿐이야.
오, 에디. 마침표를 그런 식으로 찍으면 안돼.
트럼보는 결국 마음에 두고 있던 좋은 작품을 완성하고 킹 브라더스에게 대본을 건넨다. 그 대본은 영화화되고 아카데미 상을 받게 된다. 로버트 리치라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이름으로 낸 작품이고 결국 시상식에 가지 못했지만 영화계에서는 로버트 리치가 사실 달튼 트럼보라는 소문이 퍼진다. 이것은 그에게는 큰 기회가 되었다. 커크 더글라스가 찾아와 그가 주연하는 <스파르타쿠스>의 각본을 맡기게 된다.
"제목이 뭐요?
'브레이브 원'
문제가 하나 있소.
예산?
더 심한 문제. 그건 좋은 작품이에요.
커크 더글라스는 주변 반공주의자들의 협박에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트럼보에게 일을 맡긴다. 더불어 오토 프레민져 감독 또한 트럼보에게 일을 함께하자고 제안한다. 결국 그는 <엑소더스>의 대본 또한 맡게된다. 그는 이런 대작들을 작업하면서 동시에 딸의 설득으로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로버트 리치였음을 밝힌다. 그는 반미활동 조사위원회의 업적을 비꼬면서 일할 권리만 막을 뿐이라고 비판한다.
결국 트럼보가 쓴 <스파르타쿠스>를 방해하려는 반공주의자들의 협박과 시위도 좋은 작품성을 이기지는 못 했다. 이에 더해 케네디 대통령마저 관람하면서 반공주의자들은 결국 트럼보에게 패배하게 된다. 그는 결국 영화계에서 인정받게되고 연단에 서면서 이 영화의 메세지를 전한다. 사람들은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편을 가르고 싸우면서도 싸움의 본질은 그곳에 없다. 개인이 아닌 사회라는 큰 힘에 의해 그저 강요된 행동과 말을 하게되고 결국 그것은 서로에게 상처가 되며 모두가 희생자가 되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적을 만들어낸다. 이념에 의해서 서로를 배척한다. 증오는 또다른 증오를 낳고 결국 그 감정의 골은 깊어진다. 정부, 사회가 그런 점을 이용하고 그로 인해 트럼보와 그 외의 수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받고 작품 활동을 떳떳하게 하지 못하는 현실을 영화는 꼬집는다. 동시에 시대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에게 치유의 메세지를 전한다. 영화는 이렇게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면서 끝을 맺는다.
공포의 시절이었고 그 누구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었고 가족들이 해체되었죠.
허나 그 어둡던 시절을 돌아보면서 영웅이나 악당을 찾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없었기 때문이죠.
희생자들만 있었을뿐.
오늘 하는 얘기는
누굴 아프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오로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함입니다.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 화이트로 유명한 브라이언 크랜스톤의 탄탄한 연기력에 더불어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루이스 C.K, <더 퀸>의 헬렌 미렌, 다코타 패닝의 여동생 엘르 패닝 등의 연기력은 작품의 몰입도를 더해준다. 실화라는 점에 더불어 어느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 문제점을 다룬다는 점에서 별점을 높게 주고 싶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