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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아무개 Apr 12. 2023

시골쥐가 서울에서 사는 법 04

시골쥐. 커리어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두번째 이직을 하다. 


   긴 이직 준비는 나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짧은 경력에도 불과하고 꽤 많은 곳에서 서류 합격이 되었고 개중에는 나름 선망의 기업도 있었기 때문에 희망이 없진 않구나 하는 생각에 나 자신이 꽤 괜찮은 인재로 느껴졌다. (물론 면접에서 대부분 탈락했지만.)


   오히려 좋은 시기였다. 내가 개발자로서 잘 해낼 자신감이 생겼다. 과제들도 내 기준 나쁘지 않게 해내었고 면접에선 많이 어리바리했지만 '결과'가 도출되었던 이 과정들은 나에게 크나큰 성취감을 주었다. 나는 이 시기를 결코 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경력 약 3여 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얻지 못한 개발자로서의 성취감을 얻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커리어 전반을 끊임없는 배움의 시기로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아래와 같은 더닝 크루거 효과를 이에 비교하곤 한다. 나는 아마 그때 우매함의 봉우리에 있었지 않았을까 한다. 하지만 이후 3여 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절망의 계곡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여하튼 SNS로 열심히 나의 개발자로서의 일상, 진보, 갈등들을 공유하던 차 이를 인상 깊게 보신 어느 스타트업의 CTO님께 면접을 보자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또다시 새로운 스택으로 개발을 해야 했으나 개발자에게 일이 주어지는 과정, 일을 수행하는 과정 등이 첫 번째 회사에 비해 체계적이었고 이 과정들에서는 분명 내가 개발자로서의 성취감을 얻을 수 있을 거라 확신감이 들어 면접을 보곤 바로 입사를 결정하게 되었다. 


   사실 섣부른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다. 나는 커리어 공백기를 만들고 싶지 않았고 현실적으로 월세를 내려면 공백기가 생겨선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볼 것도 없이 바로 이직을 결심하였고 퇴사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이직한 회사에서 약 1년을 채우지 못하게 되었다. 사실상 마지막엔 권고사직 아닌 권고사직을 받게 되었다. 사실 이 커리어는 나에게 흑역사가 될, 오히려 말해보아야 내 인상에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는 일이지만 나는 이 커리어를 실패로 인정하고 오답노트로서 이 글을 쓰기로 하였다. 그래서 글을 쓰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더 걸렸다. 






   나는 개발팀 내에서 원팀으로서 혼자 프로젝트를 담당하여 진행하는 일을 주로 맡게 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혼자 일하는 게 익숙하였고 이게 그리 문제 될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작업을 하며 당면한 문제에 대해 논의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꽤나 고독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유일한 사수인 CTO님께 주로 질문을 하기도 눈치를 보며 때론 문제를 숨기기도 하였다. 


   질문을 잘하는 주니어는 그것만으로도 주니어의 몫을 다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질문을 잘하는 주니어는 되지 못하였다. 우선 질문을 하기엔 너무도 위축되는 환경이었다. 그 누구도 문제 발생의 원인에 대해 함께 알아봐 주지 않았다. 그저 문제의 책임소재만 찾아 책망했다. 전혀 협업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실수에 위축이 되었다. 이 때문에 수차례 팀 내 소통에 대해 감히 주니어지만 CTO에게 의견 제시를 하곤 했고 번번이 기각되곤 하였다.


   열심히 의견 내고 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 해결해 보려고 발버둥 치는 와중에 나 스스로는 점점 위축되었다. 문제가 왜 발생했는지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저 문제만 일으키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에 매몰되어 작업 퀄리티에 신경 쓸 수 없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원체 정신없이 돌아가는 상황이었고 주니어의 실수 하나하나를 봐주기엔 너무도 경우가 없었지 않았을까 한다. 하지만 한 가지 나를 위해서 변호한다면 주니어는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주니어는 어쩔 수 없이 주니어라는 것이다. 이들은 실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실수를 한다면 왜 하는지, 이를 보안할 수 있는 시스템적인 장치는 어떤 것이 있을지를 함께 고민하는 것이 팀의 존재이다. 


   실수없이 완벽하게 해내는 괴물같은 주니어가 있을 수도 있지만 우선 난 아니다. 그리고 나를 그저 프로젝트에 방치해 놓고 어마어마한 기대를 하는 팀은 무책임한 팀이라고 말하고 싶다. 만약 체계적인 온보딩 과정이 있었고 그로부터 나에게 생긴 기대감에 부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저 프로젝트에 던져놓고 실수 없이 잘 해내오길 바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말하고 싶다. 최선을 다한 주니어는 자책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렇게 나는 개발자 커리어 처음으로 회사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아침에 눈을 뜨는 게 너무도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재택을 할 때면 가벼운 공황이 오기도 하였다. 코드를 치는 게 무서웠고 나는 개발자로 먹고살 수 없는 인간인가 보다 하는 자책을 수없이 해댔다. 하지만 내가 먹고살 일은 이것뿐이었고 지금 당장 월세를 내려면 이 일을 계속해내야 할 수밖에 없었다. 도망칠 수 없었다. 


 

   여하튼 나는 결국 몇 개의 프로젝트 이후에 퇴사를 결심하며 이직준비를 서둘렀다. 그 과정에서 1주일에 많게는 3번의 면접을 보면서 밤새 과제를 하고 위축된 정신을 붙잡으며 한 달여간을 불안에 떨며 마치 찌라시처럼 여기저기에 이력서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 20 대란 나이에 대상포진에도 걸려보고 정신과 약도 정신 차려보니 한 움큼이나 늘어있는 상황에 맞닥뜨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단 계속해서 달렸다. 그렇게 지금의 회사에 도달하게 되었다. 





여담)

   내가 있던 조직은 전체적으로 재택이 자유로웠는데 그러다 보니 서로 다른 프로젝트에 관여할 일이 없고 사무실에 출근하거나 하지 않으면 서로가 어떤 상태인지 전혀 파악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나 혼자 힘든가?라는 생각에 어느 날은 다른 팀원들에게 나 이러 이런 일로 힘든데 너는 어때?라는 식의 슬랙을 보냈다. 그런데 100이면 100 똑같은 감상의 답장이 온다. 내가 느끼는 문제는 다른 팀원들도 느끼고 있을 확률이 높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문제는 결국 개선되지 못하였고(CTO에게 문제에 대해 알림 및 개선사항 제안) 문제의식을 느꼈던 동료 2명은 나와 비슷한 시기에 함께 퇴사하게 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퇴사 이후에 만나 조직의 아쉬움에 대해 토로한다. 


   그러니 혹시 홀로 힘들어하는 분이 계시다면 한 번이라도 동료에게 고민을 토로해 보면 어떨까 한다. 대부분은 비슷한 염증을 느끼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의견이 모아져 문제가 개선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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