쁠리에 plié
어른이 되니 몸도 마음도 구부릴 일이 천지다. 자라는 아이와 눈 맞추고 함께 하는 삶은 굽힘의 연속이었다. 쁠리에는 ‘구부리다.’라는 뜻으로 클래스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배우는 동작이자 제일 기본이 되는 동작이다. 쁠리에는 드미 쁠리에와 그랑 쁠리에가 있는데, 표면적으로 보기엔 드미는 무릎을 작게 굽혔다 펴는 것, 그랑은 무릎을 깊게 굽혔다 펴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 보고 배울 때 ‘구부리는 건 또 내 전문이니까.’ 하며 껌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첫 드미쁠리에는 발바닥이 안 떨어져서 그나마 봐줄 만했는데, 그랑 쁠리에는 발 뒤꿈치가 떨어지니 중심을 못 잡아 바들바들 사시나무 그 자체였던 기억이 난다.
발레 동작들의 대부분은 평소에 잘 안 쓰는 몸의 안쪽 근육을 중점적으로 쓴다. 쁠리에가 허벅지 안쪽 근육에 시동을 걸어준다. 평소에 굽어 있던 경추, 척추, 골반은 꼿꼿하게 세우고, 허벅지 내전근을 늘리기 위해 중립이 된 몸을 아래로 내리면서 자연스럽게 무릎이 접히는 원리다. 드미 쁠리에로 허벅지 안쪽을 슬쩍 늘려주고, 그랑 쁠리에로 안쪽 근육을 더 깊게 늘린다. 1번, 2번, 4번, 5번 발 위치를 정확하게 맞추고 드미, 그랑 쁠리에를 하면 허벅지 안쪽 근육을 다양한 각도로 늘리고 쓸 수 있다.
[몸 정렬 유지- 정확한 발 위치- 내전근에 집중] 이 세 가지를 흐트러짐 없이 지키며 쁠리에를 하는 게 쉽지 않다. 이 포인트를 놓치고 동작을 하면, 정작 써야 할 내전근은 쓰지 않고, 엉뚱하게 허벅지 바깥근육과 무릎 관절만 혹사한다. 나는 인간미 있는 사람이라 쁠리에를 매 번 해도 완벽하게 한 적이 드물었다. 수강생이 적은 날 원장님이 제대로 짚고 넘어가자며 쁠리에만 한참을 배웠던 날이 있다. 쁠리에 선수권 대회 나가는 줄 알았다. 원장님이 시키는 대로 세포까지 끌어모아 집중해서 따라 했더니 정말 몸이 후끈후끈해졌다. 울산에서 기초반 수업받을 때 앞에 서있는 고급반 수강생이 쁠리에를 시작하며 등이 촉촉해졌던 게 생각났다. 먼저 운동이라도 하고 오셨나. 이제 시작인데 왜 벌써 땀을 흘리시나 신기해했던 기억이 났다. 몸을 제대로 쓰셨던 분이었네.
아킬레스건을 다쳐서 쁠리에를 할 수 없게 된 적이 있었다. 부상 후 충분히 쉬다가 살만해져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발레 해보겠다고 학원에 호기롭게 출동했었다. 음악이 시작되고 쁠리에를 하려고 하는데 다쳤던 근육이 뜨끔했다. 턱! 하고 문턱에 걸린 바퀴가 된 느낌이었다. 빠르게 후퇴하고 할 수 있는 동작만 했다. 바 첫 순서만 무사히 넘어가면 지장이 없겠다 생각했던 건 크나큰 오산이었다. 쁠리에 없는 발레는 앙꼬 없는 찐빵이었다. 대부분의 동작에 쁠리에가 섞여있었고, 특히 점프나 턴을 할 때 쁠리에의 유무에 따라 동작의 깊이가 달라졌다. 화살을 쏘려면 활시위를 세게 당겨야 활이 빠르고 멀리 나가는 것처럼, 쁠리에를 깊게 할수록 더 높이 뛰고 정확도 높은 턴을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부상기간 동안 맹숭맹숭한 발레를 하면서 쁠리에가 빛과 소금 같은 존재였다는 걸 이렇게 배웠다.
종종 집을 비웠다 늦게 들어가면 엉망진창이 되어있을 때가 있다. 주방부터 거실까지 자유분방했던 가족들에게 분노가 울컥 올라온다. 이런 순간 희한하게 쁠리에가 생각난다. 내가 우리 집 쁠리에였구나… 하면서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데 대부분 실패한다. 가족들에게 쁠리에 특강을 열어 나의 소중함을 체득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