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발레 하는 쿠크다씨

메도라를 배워보자

by 쿠크다

하루하루가 기계처럼 돌아가는 나날이 있다. 기계라 감정도 얼어붙고 몸은 할 일을 해내는 삶. 그나마 발레가 꽝꽝 얼어붙은 감정을 조금씩 녹여 종종 슬러시로 만들어줬다. 지치니까 발레도 그만둘까.. 이런 생각할 여력도 없이, 기계적으로 재등록하고 착실하게 다녔다. 수업에 가면 속으로 웃고 울고 화내고 또 넘어지고 뛰어오르면서 살아있음을 느꼈다. 땀에 흠뻑 젖고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욱신거리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배시시 웃음이 났다. 하루 종일 방전된 로봇같이 살다가 발레만 다녀오면 '맞아. 나 사람이었지.'하고 소생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토요일 오전 작품반 수업이 새로 열렸다. 무슨 작품을 배우는지 알지도 못했지만 좀 더 사람이고 싶어서 고민도 없이 신청했다.


그렇게 시작된 주말 수업의 첫 작품은 [해적] 3막 파샤의 정원의 메도라 솔로 부분이었다.

[해적]을 짧게 요약하면 해적 단장 '콘라드'가 노예무역 선의 사람들을 구하고, 허구한 날 약탈당하는 섬마을의 추수감사 축제에서 소녀 '메도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노예로 팔려간 그녀를 구출해 내는 사이 일어나는 인간사와 모험에 대한 이야기다. (나라마다 감독마다 다 다르게 각색되어서 스토리가 약간씩 다르다.) '3막 파샤의 정원 메도라 솔로'는 악덕 상인 파샤가 메도라를 궁전에 가두고, 해적단장 콘래드가 메도라를 구하러 상인으로 변장해 그 궁전에 찾아간 상황이다. 파샤는 자기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정원에서 억지로 끌고 온 예쁜 소녀들을 과시하는 연회를 하는데, 그때 메도라가 추는 독무다.


https://youtu.be/1AgeznA7LGo?si=Jkg2PmMDj57KCQBl

3막 메도라 솔로


선생님은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 남짓하여 배우기에 난이도가 어렵지 않은 작품에 속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온전히 선생님 기준이라는 걸 첫 동작 배우자 마자 알았다. 아가 걸음마 배우듯 순서를 차근차근 배우고 복기한 뒤, 다 같이 음악에 맞춰봤다. 사실 순서를 외우느라 정신이 없어 제대로 하는 건지도 모르고 따라 했다. 수업은 다 같이 연습하고 마지막엔 한 명씩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선생님에게 개인 코멘트를 받는 형식이었다. 같이 할 땐 못해도 보호색처럼 자연스럽게 묻어갈 수 있었다. 두 명씩 조를 나눠해 볼 때에는 내가 계속 틀려 옆사람을 혼란에 빠트렸고, 혼자 할 땐… 메도라인지 메뚜기인지도 모르게 엉망이었다. 혼자 마무리 동작까지 하고 뒤돌아 '이게 맞아요?' 하는 눈으로 선생님을 바라봤다. “잘했어요. 할 수 있어요!” 응원으로 답하셨다. 바닥난 에너지를 끌어 써서 그런지 첫 수업 끝나고 아이와 남편을 팽개치고 주말 내내 잠만 잤다.


1분 약간 넘는 원곡을 기-승-전-결 네 부분으로 잘게 쪼개 네 번에 걸쳐 순서를 배우고 나머지 4회의 수업으로 디테일을 잡아나가는 커리큘럼이었다. 주말마다 다가오는 수업을 임하기 전 '나는 메도라다.' 자기 암시를 했지만, 몸은 그전 수업에 배운 모든 것을 리셋한 채 늘 새로 시작했다. 진도는 술술 나가지만 실력은 제자리인 걸 보니 내가 발레를 하고 있는 게 맞긴 했다.


시간이 흘러 클라이맥스 동작을 배우는 시간이 찾아왔다. 먼저 '짠'하고 클라이맥스로 향할 포즈를 취한다. 업을 선 다리를 꼬챙이처럼 꼿꼿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다른 한 다리는 앞으로 뻗어내는걸 동시에 해야 했다. 원래는 꼬챙이 한 다리로 연습실 구석에서 무대 앞으로 쭉 나와야 하는데 난이도를 낮춰 다리를 바꿔 쓸 수 있게 동작을 바꿔주셨다. 음악에 맞춰 동작을 하는 순간, 다리에는 무릎이라는 관절이 있다는 걸 실감했다. 관절은 접히라고 있다는 사실도 덤으로 알았다. 절대 펴지지 않는 다리로 다그닥 다그닥 거리며 연습실 끝을 향했다.


늘 긍정적이시던 선생님이 처음으로 '이상한데...'라고 속삭였다. 그 이후로 제일 많이 들은 말은 '펴세요!'였다. 연습실을 가득 채운 세 음절 '펴세요'는 단음절의 외침 '펴!!!'로 바뀌었다. 코어에 힘이 부족한 상태에서 다리를 펴려고 안간힘을 썼더니 종아리 알에서 사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팔 동작을 배우고 나니 더 총체적 난국이었다. 상하체가 동기화 안 되는 괴상한 내 모습을 거울로 보고 있자니 로봇도 웃을 지경이었다. 복습 차원으로 집에서 유튜브 영상을 볼 때마다 이걸 한 다리로 하는 그대들은 정녕 사람이 맞나 싶었다.


계속될 것 같은 8주가 정말 빠르게 흘러서 마지막 수업 날이었다. 선생님이 기념으로 한 명씩 찍자고 휴대폰을 받아 가셨다. 모두가 선의 없는 양보를 하며 순서를 미루고 미루다 한 명씩 잡혀가서 촬영을 했다. 나도 워낙 자신이 없던 터라 최대한 뒤에 서 있었다. 다들 돌아와서 '이게 최종본인 걸 비밀로 하자.' 'Before라고 하고 After는 못 찍은 셈 치자.' 해서 더 무서웠다. 내 차례라는 걸 안 순간부터 실성하기 시작해 정신 차리니 촬영이 끝났다. 선생님은 각자 본인의 영상을 보고 재정비해서 한 번 더 찍겠다 하셨다. 거울치료 요법이 이런 거구나 생각했다. 재생 버튼을 누른 순간 실성한 메도라가 눈앞에 나타났다. 나사 빠진 것처럼 앞니를 내놓고 웃으며 춤을 추는 모습이 여실히 담겨 있었다. 정신 차리고 무릎이나 똑바로 펴야겠다 다짐한 뒤 마지막 메도라를 만나기 위해 연습실에 섰다. 그 작품 제목은 ‘무릎 못 편 메도라’가 되었다.


희로애락 가득했던 수업이 끝나니 후련하면서도 아쉬웠다. 기계가 아닌 에너지 충만하고 밝은 사람이었을 때 메도라를 배웠다면 어땠을까 궁금하다. 아쉽다 부족하다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지만 무릎은 피지 못해도 얼굴이 환하게 핀 메도라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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