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루
무대에 올라 보는 꿈은 늘 신기루처럼 살짝 보였다가 사라져 버렸다. 울산에서 발레 배울 때 처음 학원 정기공연 연습을 보며 호기심이 싹텄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무대의상 피팅하는 걸 바라보며 다음 정기공연에 꼭 나도 올라야겠다는 꿈이 자랐다. 안타깝게도 꿈이 생기자마자 바로 제주로 이사가게 되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램프의 요정이 소원을 들어준 걸까. 제주로 이사 간 뒤 다니게 된 학원에서 한 달 만에 무대에 올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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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이랄 것도 없이 오른 무대였다. 그 공연을 본 남편의 ‘그 학원은 다니면 안 될 것 같아.’라는 한줄평과 함께 학원과의 인연은 끝났다.
이후 발레를 잠시 그만뒀고 소원을 들어준 램프가 일회용 플라스틱이었던 게 분명하다 여기며 살았다. 여러 학원을 거치다 다니게 된 학원에도 정기 공연이 있었다. 드디어 공연이 다시 눈앞으로 다가왔다!! 기쁨도 잠시… 매년 진행했던 정기공연은 학원 사정으로 한 해 쉬어 가게 되었다. 역시나 신기루였구나. 재빨리 마음을 접고 당장 눈앞에 발레나 제대로 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학원에 정이 들고 실력은 늘고 있나 의심이 들 무렵이었다. 연말 정기공연을 준비한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마음을 접어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이 공연하면 구경이나 가야겠다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원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인원 모집이 쉽지 않아 보였다. 최소 네 명은 되어야 하는데 세 명이 모인 상황이었다. 남일이라 여기다 문득 '이게 또 신기루일지 몰라.. 그렇지만 내 몸뚱이가 제일 최신버전일 때 도전해 보자.'는 마음으로 눈 딱 감고 신청했다. 토슈즈 수업 때도 그렇고 나는 꼭 인원미달인 상황에 이끌려 마지막으로 합류한다. 내가 이렇게 불쑥 튀어나오는 용감함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일주일에 두 번 정규 수업 뒤에 1시간, 12월 말 첫 연습을 시작으로 약 두 달 동안 연습해 2월 말에 무대에 오르는 코스였다. 아직 어떤 작품을 할지 정해지진 않았지만 큰 부담이 없이 해낼 근자감이 있었다. 최선을 다해 연습해서 최고 멋지게 해내야겠다는 의욕만 한가득이었다. 모인 인원이 네 명인 것을 감안해 선택된 작품 이름은 [파드 까트르]였다. 원래 작품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지만 난생처음 듣는 단어라 "파.. 파 뭐요??" 했던 기억이 난다.
작품 이름 듣고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1845년에 줄스 페로라는 안무가가 만든 낭만발레 작품이다. 파드 캬트르 (Pas de quatre)의 파(Pas)는 ‘스텝’ 캬트르(Quatre)는 숫자’ 4’를 뜻한다. 그 당시에 유명세를 떨치던 발레리나 네 명 (루실 그란, 카를로타 그리시, 패니 체리토, 마리 타글리오니)을 모아 만들어서 이름이 파드캬트르다. 수줍음, 가벼움, 섬세함과 우아함을 발레로 표현한 고전 낭만주의 대표 작품이다. 당대의 최고의 발레리나들과 ‘발레’하면 떠오르는 멋진 단어들을 동작으로 표현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처음 런던에서 선보였을 때 굉장히 센세이셔널했다고 한다. 방송사에서 하는 연말 시상식에 당대 잘 나가는 아이돌들 넷 뽑아 무대 만든 느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날고 기는 발레리나들이라 그런지 기싸움과 갈등이 많았다는 후문에 저절로 실소가 나왔다. 등장 순서도 나이 순으로 가장 어린 사람부터 나이 많은 순으로 정한 거 보면 말 다했다. 실제로 이 멤버로 무대 위에 오른 건 단 네 번이라고 하니 많이 싸운 건 맞나 보다. 유튜브로 다양한 버전의 파드캬트르를 보면서 '이걸 내가 하게 되다니… 세상 우아하고 예쁘잖아....' 하며 벅차올랐다. 비록 날고 기지는 못하지만 아무튼 뭐라도 된 것 같았다. 그리고 함께 할 분들과 연습하면서 싸우는 일이 없게 최대한 배려하고 도와야겠다 다짐했다. 싸우다가 무산되어서 또 신기루로 남는 건 너무 슬프기 때문이다.
오래전 (엉망이었지만) 처음 무대의 맛을 보고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번만큼은 공연이 끝나고 남편의 한줄평이 '여기도 그만두자...'가 아니길 바랐다. 여기 그만 두면 갈 데도 없다. 신기루가 이제 현실이 되었으니 또 홀연히 사라지지 않게 잘 해내봐야겠다 다짐했다. 이번 글은 거의 다짐 로봇 수준으로 다짐하다 끝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