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여행하며, 영화 속 장면을 거닐다
홍콩별 여행자 05.
한국산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으로 한국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깔깔대며 웃는 모습. 이제는 홍콩의 지하철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얼마 전, <런닝맨>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홍콩 로케이션을 다녀간 후로, 한류의 열풍이 더욱 거세지고 있는 느낌이다. 사무실에서도 점심시간에 모니터로 한국의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는 홍콩 사람들을 매일 볼 수 있다.
이들을 볼 때마다 우리 어렸을 적 학창시절이 생각날 때가 있다.
그때는 지금과 반대로 홍콩 영화가 대세였다. 주윤발과 장국영의 시대를 거쳐 80년대 유덕화, 장학우, 곽부성, 여명 등 이름만 들어도 여전히 가슴이 두근 거리는 홍콩의 멋진 배우들이 4대 천황이라 불리며, 아시아를 호령하던 때가 있었다.
홍콩에 살면서 한 동안 추억 속에 묻어 두었던 옛 홍콩 영화들을 다시 꺼내어 보기 시작했다. 지금에 와서 보면, 굉장히 어설프고, 촌스럽고, 때론 유치하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그 속엔 옛 학창시절의 추억과 향수가 담겨 있어 영화를 보는 내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요즘 다시 찾아 본 홍콩 영화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라면, 단연코 유덕화의 <천장지구>다.
유덕화가 한 성당에서 그의 연인 오천련과 만나 둘만의 결혼식을 마친 후, 몰래 빠져나와 마지막 복수를 위해 피를 흘리며 어두운 뒷골목을 걸어가던 그 마지막 장면.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게 남았던 이 마지막 장면에 등장했던 성당은 바로 해피밸리의 “성 마가렛 성당”이며, 유덕화가 피를 흘리며 걸어갔던 그 뒷골목은 바로 홍콩섬 센트럴의 “두델 스트리트”다.
홍콩에 살면서 옛 홍콩 영화들을 보게 되면, ‘아, 그때 나왔던 장면이 바로 이 장소에서 찍은 거구나’ 하는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 장소들은 주변에서 멀리 떨어진 특별한 장소가 아닌, 일상의 주변에 펼쳐지는 의외로 매우 익숙한 장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늘 이야기한다. 홍콩은 영화 같은 도시고, 나는 영화 속에 살고 있노라고……
유덕화의 <천장지구>를 비롯하여 장국영의 <금지옥엽> 등 여러 영화에 단골 배경으로 등장했던 이 두델 스트리트는 영화에서처럼 약간 음울하면서도 멋스러운 분위기도 있지만, 홍콩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가스등이 있어 의미 있는 곳이기도 하다.
1840년대 홍콩은 법을 만들어 홍콩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집 앞에 가스등을 켜 놓도록 강제했다. 당시 홍콩 정부는 음침한 홍콩의 거리 분위기를 밝게 하여 범죄를 예방하고자 이처럼 가스등 설치를 의무화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862년에 당시 홍콩 최초의 국영기업이었던 홍콩차이나 가스컴퍼니(Hong Kong and China Gas Company )가 동양에서는 최초로 도시 전체에 전기 조명을 설치하기 시작하면서, 전기 조명이 점차 가스등을 대체하게 되었고, 현재는 두델 스트리트의 돌계단을 비추고 있는 4개의 가스등만이 홍콩에 남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늘 지나 다니던 이 거리를 다시 한 번 찾아가 보았다.
홍콩의 친구들과 종종 커피를 마시러 찾아오던 거리인데, 그 당시에는 이 가스등의 존재나 영화 속의 장면을 알지 못했다. 그냥 평범한, 홍콩의 수 많은 뒷골목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거리에 얽힌 가스등의 역사와 천장지구의 마지막 장면을 알고 나서 이 거리를 다시 걸으니, 뭔가 특별한 느낌이다. 그저 평범한 홍콩의 뒷골목이 다시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특별한 장소로 재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렇게 홍콩의 거리 곳곳에 숨어 있는 옛 홍콩 영화의 추억들은 문득 문득 학창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며, 점점 더 홍콩의 매력에 빠져들게 한다.
두델 스트리트의 좁은 골목길에 들어서면, 약간 경사 진 도로가 길게 이어지고, 그 도로의 막다른 끝에 오래된 돌계단이 놓여 있다.
이 경사진 골목길은 영화 <천장지구>의 마지막 장면에서 유덕화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가던 바로 그 골목길이며, 이 골목의 끝에 있는 고풍스러운 돌계단은 영화 <금지옥엽>에서 장국영이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걸어 내려오던 바로 그 계단이다.
이처럼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곳이다 보니, 주말이면 어김없이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차려 입은 예비 신랑 신부들의 야외 촬영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사실 아무것도 모르고 이 계단을 오를 때는 단지 다리가 아프고, 숨이 차오를 뿐이었는데, 이 거리에 얽힌 사연과 영화 속의 장면들을 알고 나니,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가파지는 숨소리가 점점 설렘으로 느껴진다. 역시, 오래된 이야기가 있는 장소에는 언제나 여행자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특별한 매력이 있는 법이다.
돌계단을 오르며, 거친 숨소리가 점점 더 빨라지려 할 때 즈음, 그 중간쯤에 스타벅스가 하나 있다. 나는 돌계단의 중간쯤에서 이어진 통로를 따라 스타벅스로 들어가 보았다. 홍콩의 친구들과 점심식사 후 종종 커피를 마시러 오던 그 곳이다.
나는 이 스타벅스를 볼 때마다 “스타벅스”라는 브랜드의 보편성 때문에 이 낭만적인 돌계단과 오래된 역사의 가스등이 서 있는 이 곳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스타벅스 역시 그런 점을 의식했는지 내부 인테리어에 특별히 신경을 써 다른 매장들과는 색다른 모습으로 꾸며놓았다. 매장의 절반은 다른 스타벅스 매장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매장 안쪽의 공간은 일반적인 스타벅스 매장의 분위기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현대적인 느낌의 세련된 가구 대신, 약간 불편하지만 오래된 느낌의 나무 테이블과 딱딱한 나무 의자, 벽에 따닥 따닥 붙여 놓은 빨간색 바탕의 메뉴판, 그리고, 곳곳에 놓여 있는 중국스러운 느낌의 아기자기한 소품들까지……
마치 60~70년대 홍콩의 차찬탱에 와 있는 것 같은 색다른 분위기가 펼쳐진다. 매장의 절반은 현대적이고, 나머지 절반은 전통적이다.
이 특별한 공간의 인테리어는 1960년대 홍콩 스타일을 모티브로 꾸며졌다고 한다.
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가구와 인테리어 소품들은 홍콩 전통 스타일의 세련된 인테리어 가구 및 소품 전문 매장인 지오디(GOD)에서 만든 것들이다. 이 특별한 분위기 때문인지, 스타벅스 매장 안에도 역시 웨딩 촬영 중인 예비 신랑 신부들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나는 주말 오후, 커피 한 잔의 여유가 그리울 때면 종종 이 두델 스트리트의 스타벅스를 찾아갔다. 그리고, 홍콩 특유의 진한 커피 향과 부드러운 크림의 촉감이 좋은 에스프레소 마키아토 한 잔을 주문했다.
스타벅스 만의 보편적인 커피 향내가 조금 아쉽긴 하지만, 이 장소가 주는 특별함을 더해 마시면, 그 향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늘 사람들로 붐빈 센트럴의 거리를 배회하다가 어디론가 들어가 잠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가지고 싶다면, 두델 스트리트의 스타벅스로 가보면 어떨까?
스타벅스가 주는 보편성이 진부하게 느껴진다면, 커피 한잔에 한 스푼의 설탕과 더불어 이 장소가 주는 특별함을 더해 마실 것을 권하고 싶다. 그렇게 홍콩에서의 나의 일상은 영화 속의 장면들과 어울려 흥미롭게 진행 중이다.
살며 여행하며, 이런 날들이 언제 또 있을까? 영화 같은 도시, 홍콩이라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글/사진) Tripp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