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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urbet Mar 07. 2016

빅토리아 시대의 옛길을 걷다

홍콩에서 가장 오래된 트레일

홍콩별 여행자 12.

빅토리아 시대의 옛길을 걷다


토요일 오전 8시. 평소엔 주로 늦잠을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한국에 있을 땐 자주 그랬다. 잦은 야근으로 주중에 쌓였던 피로와 부족했던 아침 잠을 토요일 늦잠으로 만회해야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 생활 패턴은 홍콩에 와서도 한 동안 크게 바뀌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보다는 자주 아침 일찍 일어나 주말 하이킹을 떠나기도 했다. 


어쩌다 한 번 눈부신 아침 햇살이 평소보다 환하게 내리쬐는 날이면, 어쩔 수 없이 일찍 눈을 뜨고 만다.  창문을 통해 침실로 내리쬐는 눈부신 아침 햇살은 굳게 잠긴 눈꺼풀을 관통하여 환하게 비출 만큼 강렬했다. 


그 환한 햇살에 어쩔 수 없이 눈을 뜨게 되면, 나는 가장 먼저 홍콩 하이킹 가이드북을 펼쳐본다. 그럴 때마다 우연히 펼쳐지게 되는 첫 페이지가 바로 그 날 하이킹의 목적지가 되고 만다. 


그렇게 오늘 당첨된 하이킹 코스는 웡 나이청 저수지에서 출발하여 홍콩섬 동쪽의 타이 탐 컨트리 파크까지 이어지는 홍콩 트레일 제 6코스다.


택시를 타고 하이킹 코스의 기점인 웡 나이청 저수지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견고하게 쌓아 올린 오래된 돌담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웡 나이청 저수지의 물을 가두고 있는 돌담이었다. 



홍콩은 섬이다 보니, 항상 물이 부족했다. 지금은 수도관이 중국 본토까지 이어져 부족한 물을 대륙으로부터 보충받고 있지만, 영국 통치하의 옛 식민지 시대에는 고질적인 물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이렇게 군데군데 저수지를 만들어야 했다. 


영국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웡 나이청 저수지의 돌담은 마치 중세의 성벽과 같은 견고함이 느껴진다. 나는 저수지의 물을 가두고 있는 이 견고한 돌담길을 따라 걸어갔다. 


그 돌담길의 끝에 계단이 이어지고, 그 계단을 내려가면, 숲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나타난다. 이 오솔길로부터 시작되는 홍콩 트레일 6코스는 1847년에 만들어진 트레일로서 홍콩에서 가장 오래된 길 중 하나라고 한다. 


이 트레일을 따라가면 리펄스베이를 지나 스탠리까지 걸어갈 수 있다. 영국 식민지 초기 가장 번성했던 항구는 스탠리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 트레일을 이용하여 홍콩섬 북부에서 남동부의 스탠리까지 이동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 트레일을 걷고 있으면, 옛사람들이 걸어간 발자취를 따라가게 되는 셈이다. 


홍콩 트레일 제6구간의 초반부는 빗물을 모으는 역할을 하는 산 중턱의 수로를 따라 걷게 된다. 홍콩섬의 하이킹 코스를 걷다 보면, 이런 수로를 종종 보게 되는데, 비가 오면 이 수로를 따라 흘러내린 물이 저수지로 모이게 된다. 


수로의 반대편으로는 나뭇가지 사이로 홍콩섬 동부의 도심 풍경과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멋스러운 고급 저택들이 종종 눈에 띈다. 


영국 식민지 시대의 서양인들은 홍콩의 덥고 습한 날씨를 피해 상류층일수록 상대적으로 시원한 고지대에 저택을 짓고 거주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지금도 여전히 고지대로 갈수록 홍콩의 최고 부자들이 살고 있는 고급 저택과 빌라들이 눈에 많이 띈다. 



홍콩섬의 멋진 전망을 바라보며 트레일을 걷다 보면, 숲 속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숲속의 바람을 맞으며, 트레일을 걷는 기분은 언제나 최고다. 


게다가 숲에서 만나게 되는 이름 모를 들꽃들과 그 주변을 날아다니는 호랑나비와 잠자리들,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물소리와 새소리는 도시 생활에 지친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 준다. 이것이 바로 홍콩 트레일의 매력이다.


그렇게 상쾌한 기분으로 1시간 반 정도를 걷다 보면, 어느새 홍콩섬의 남쪽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눈 앞에 남중국해의 푸른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저만치 바닷가 언덕 위의 오션파크가 보이고, 여기서 조금 더 걸어가면, 홍콩섬에서 가장 부유한 휴양 해변이라는 리펄스 베이를 내려다볼 수 있다. 



여기서부터는 절벽을 따라 이어진 좁은 난간길을 걷게 되는데, 탁 트인 시야로 내려다 보이는 리펄스 베이의 멋진 풍경과 시원한 바닷바람이 정말 최고다. 사람들은 이 곳에서 잠시 쉬어간다. 


나 역시 이 곳에 서서 한참 동안 최고의 기분을 만끽하며, 미리 준비해 온 빵과 우유로 간단히 아침식사를 했다. 정말 어느 고급 호텔의 조식 뷔페 못지않은 멋진 아침식사였다.


리펄스 베이를 지나가면, 이제 다시 한 동안 숲길이 이어지는데, 이 숲길은 잠시 후 완차이에서 스탠리로 넘어오는 윌슨 트레일과 만나게 된다. 그 교차점에서 오른편 계단으로 내려가면, 타이 탐 컨트리 파크로 이어진다.


타이 탐 컨트리 파크는 홍콩섬에서 가장 큰 녹지 공원이다. 저수지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한 곳인데, 한국의 유원지처럼 요란스럽게 개발된 것은 아니고, 옛 영국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댐과 다리, 그리고 저수지를 따라 이어진 산책로와 바비큐 시설이 전부다. 


1860년대 홍콩 사람들은 우물이나 개천에서 물을 가져다 사용했다. 그러다가 1871년 폭푸람(Pok Fu Lam)에 홍콩 최초의 저수시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저수지 하나로 고질적인 물 부족이 해결되지 못하였고, 타이 탐에 대규모 저수지를 건설하게 되었다. 무려 35년에 걸친 대공사였다고 한다. 이때 건설된 타이 탐 저수지는 현재까지도 홍콩섬 물 공급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저수지 주변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를 걸어가니, 웡 나이청 저수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중세의 성벽을 연상케 하는 돌담과 돌다리가 나타난다. 타이 탐 저수지는 상류부터 중류와 하류까지 세 곳의 저수지가 차례로 연결되어 있는데, 중간에 수위 조절을 위한 작은 댐이 하나 있었다. 


나는 최대한 댐 근처까지 내려가 보았다. 어젯밤 내린 비 탓인지 댐에서는 폭포수 같은 물이 콸콸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다지 큰 댐은 아니어서 수문이 열렸어도 엄청난 굉음이나 물안개까지는 없었지만, 쏟아져 내리는 물소리가 경쾌하여 듣기 좋았다. 


그리고, 물이 흘러 내려가는 저편으로 중세 느낌의 옛 돌다리가 보이는데, 에메랄드 빛깔의 호수와 어울려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타이 탐 컨트리 파크에는 영국 식민지 시대 초창기의 건축 유산 21개가 남아 있다고 한다. 멋진 자연과 어울려 더욱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21개의 유산들을 이어 만든 트레일 코스가 바로 ‘타이 탐 헤리티지 트레일’이다. 


푸른 자연과 시원한 바람, 그리고 이들과 너무 잘 어울리는 아치형의 멋스러운 옛 돌다리... 타이 탐 헤리티지 트레일을 걸으며 볼 수 있는 풍경들이다. 그리고, 이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그 종착지인 타이 탐 로드(Tai TamRoad)에 이르게 된다. 



이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는 이미 많이 지쳐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멋진 풍경에 도취되어 잊고 있었던 피로함이 한 순간에 몰려들기 시작한 곳이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쉬었다가 옛사람들이 걸어 간 종착지인 스탠리까지 가보고 싶었지만, 이미 지쳐버린 내 두 다리는 눈 앞에 서 있는 택시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택시 기사가 육중한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 사진 찍으러 오셨나 봐요?  나도 사진 참 좋아하는데……타이 탐 정말 멋지죠?  나도 시간 날 때마다 이 곳에 와서 산책하고, 사진도 찍고 그런답니다. 홍콩에서 여기만큼 자연이 멋진 곳도 없지요.”


“네, 그렇군요”


나는 방긋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있었다. 택시 기사의 말처럼, 타이 탐 컨트리 파크는 정말 멋진 곳이었다. 



싱그러운 자연 속에서 가볍게 산책하며, 잠시나마 홍콩의 복잡스러운 도시 생활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곳. 그리고, 옛 사람들이 걸어 간 발자취를 따라 그 흔적들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곳.


눈부신 아침 햇살이 게으른 나를 잠에서 깨운 어느 토요일 아침, 나는 빅토리아 시대의 옛사람들이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 홍콩 트레일 제 6코스를 걸었다. 


그리고, 그 멋진 하이킹은 토요일 아침의 늦잠보다도 나를 더욱 회복시켰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힐링’ 이 아니었을까? 


(글/사진) Tripp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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