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가도 괜찮아 길만 제대로 알고 있다면...
조선 왕조 시대부터 2015년의 대한민국까지 약 600여 년간 도읍지였더 서울의 골목들을 걷다 보면, 흘러간 시대의 궤적들을 곳곳에서 조우하게 된다.
어떤 골목에서는 조선 왕조 시대부터 그 자리에 있어 온 옛 궁궐과 성벽들을 마주하게 되고, 어떤 골목에서는 그 만큼이나 오래 되었을 법한 낡은 기와집을 마주하게 되며, 또 어떤 골목에서는 공룡처럼 거대한 초고층 빌딩과 그 사이 사이에 자리 잡은 아직 허름한 옛 건물들을 마주하기도 한다.
서울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렇게 있어 왔고, 그 역사의 흔적들을 우리 일상의 주변에 고스란히 품고 있는 도시다. 특히,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종로구 부암동은 서울의 수 많은 골목과 동네들 중에서도 흘러간 시대의 흔적들을 상당히 많이 간직하고 있는 동네다.
경복궁의 뒤편,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에 자리 잡은 부암동은 서울의 도심에서 걸어서 닿을 만큼 지척에 있지만, 아직까지는 놀라울 만큼 개발되지 않은 채로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다.
나는 불광동으로 이사 온 이후로 집에서 가까운 부암동을 종종 찾아가 이곳 저곳을 걸어보곤 했다. 나의 부암동 산책은 대원군 별장으로 알려진 석파정에서 시작된다.
석파정은 본래 조선 말기의 중신 김흥근의 별장이었다. 당시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이 곳의 경치에 반하여 김흥근에게 별장을 팔라고 제안했다.
김흥근은 그 제안을 거절하였는데, 대원군이 아들 고종과 함께 석파정에 찾아가 묵게 되었고, 임금이 묵었던 곳에 신하가 살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김흥근의 별장을 강탈하여 소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이 한 눈에 반할 만큼, 석파정의 경관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여전히 빼어나다. 게다가, 석파정이 있는 부암동은 조선의 정궁이었던 경복궁과도 인접한 거리여서 과거부터 조선의 중신이나 양반들이 많이 거주했던 마을이었다.
부암동 초입의 석파정에서 부암동 주민센터 방향으로 언덕을 오르다 보면, 길가의 담벼락에 이런 글귀가 씌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 천천히 가도 괜찮아 길만 제대로 알고 있다면……”
낙서처럼 담벼락에 대충 씌어진 이 글귀는 권용철의 <넌 이미 위대한 생존자>라는 책에 씌어진 글귀라고 한다. 나는 이 담벼락의 글귀 앞에서 가야 할 행선지를 잊은 채 한 동안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빨리 가라고만 외치는 이 숨막히는 사회 속에서 어느 누구도 나에게 괜찮다는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담벼락이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말이다. 나는 이 글귀 앞에서 쉬이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우린 과연 그렇게 쉼 없이 어디론가 빠르게 달려 가면서 가는 길을 제대로 알고나 있었던 것일까?
이 담벼락은 그런 나에게 그래도 걱정 말라며, 지금 이대로 존재하고 있으니, 넌 이미 위대한 생존자라고 그렇게 큰 위로를 전해주고 있었다.
이 담벼락에 이런 글귀를 남긴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문득 궁금해졌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가 남긴 이 낙서 같은 글귀가 부암동을 찾는 많은 이들에게 나처럼 큰 위로가 되었길 진심으로 바래볼 뿐이다.
부암동은 이 글귀처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시대의 흐름과 동떨어져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리고, 2015년의 지금, 부암동은 서울의 다른 동네들과 달리 좀 더 여유롭고, 평온해 보인다.
부암동 골목길 곳곳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낡은 기와지붕과 오래된 성곽, 그리고 아직 예스러운 상점들을 보면, 이 곳은 여전히 시간이 정지된 채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 보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곳곳에 들어서기 시작한 예쁜 카페와 식당, 그리고 멋진 저택들을 보면, 부암동은 느리지만 천천히 그리고 평온함을 유지한 채 조금씩 변해가고 있음을 눈치 차리게 된다.
이런 부암동의 골목 골목을 걷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걸음이 느려지고, 마음이 느려지며, 생각이 많아지게 된다.
이상하게도 창의적인 생각은 느린 마음으로부터 많이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다. 나는 그래서, 무언가 생각이 필요할 때, 이곳 부암동을 찾아 느릿느릿 걸어본다.
때론 인왕산 등산길을 따라 부암동과 평창동의 전망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자하미술관까지 올라가 보기도 하고, 때론 허름한 주택가들이 자리 잡은 좁은 골목길을 따라 목적 없이 방황하다가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올라가 보기도 하고, 또 때론 가파른 백석동길을 따라 백사실 계곡을 거쳐 세검정길로 내려오기도 한다.
그럴수록 나는 생각이 많아지고, 많아진 생각 탓에 무언가를 끄적 끄적 쓰고 싶어 진다. 바로 지금처럼.
윤동주 시인 역시 후배 정병욱과 누상동에서 하숙하던 시절에 아침마다 북악산과 인왕산에 오르고, 또 때때로 부암동의 언덕에 올라 밤 하늘의 별을 헤며, 많은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누상동 하숙시절에 씌어진 시인의 작품들은 이 곳 부암동에서 영감을 얻은 것도 많을 것이다. 부암동은 그렇게 무언가 생각이 많아지는 특별한 동네다.
최근 몇 년간 수 차례 TV 드라마의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부암동을 찾는 발길들이 많아졌다. 게다가 그 드라마들 중 몇몇은 해외에서 크게 인기를 끌면서 최근에는 부암동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아졌다.
부암동을 찾는 발길이 늘어나니, 자연히 멋진 카페도 생기고, 맛있는 식당도 늘어난다.
그래도 여전히 다른 동네들에 비하여 부암동은 천천히 변해가고 있다. 그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유가 어찌되었건, 부암동이 여전히 지금처럼 시대의 흐름과 조금은 거리를 둔 채 느릿느릿 발전해 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리고, 석파정, 창의문, 한양성곽과 같은 옛 시대의 흔적들과 낡은 채 쓰러져 가는 옛 기와집들의 흔적들. 그리고 새로이 자리 잡은 예쁜 상점과 카페들이 조화롭게 공존해 가는 도심 속 히든 플레이스로 계속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가끔 이렇게 느리게 걸어도 전혀 마음이 급하지 않은 그런 동네가 하나쯤 내 일상의 주변에 간직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By Courb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