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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urbet Oct 10. 2015

바람 부는 날, 피크가 좋다

평생 잊지 못할 내 인생 최고의 반 나절 산책

홍콩별 여행자 02.

바람부는 날, 피크가 좋다


가을이 오면, 홍콩에도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4월부터 시작되었던 지리하고 긴 홍콩의 무더위가 끝나가는 순간이다. 


산들 산들 불어오는 가을 바람에는 알맞은 정도의 시원함이 묻어 있다. 촉촉한 물수건으로 정성스레 얼굴을 어루만지듯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게 기분 좋은 날에는 “빅토리아 피크”를 산책하고 싶어 진다. 그 곳엔 좀 더 시원한 바람이 있다. 그 시원한 바람을 찾아 나는 무작정 택시를 잡아 타고, “빅토리아 피크!”를 외쳤다.


빅토리아 피크는 홍콩섬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피크에 오르면, 전망대가 있고, 레스토랑과 쇼핑몰이 있고, 전망 좋은 카페가 있으며, 무엇보다 늘 많은 사람들이 있다. 홍콩에서 전망이 가장 멋진 곳이니,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고 붐비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이 곳에 뜻밖의 풍경이 하나 있다. 피크 주변의 높은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대저택과 고급 빌라들. 택시를 타고도 산길을 빙글빙글 돌아 한참을 올라와야 하는 이 높은 산 꼭대기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문득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교통도 불편한 이 높은 곳에 부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기원은 영국 식민지 초기의 역사로 돌아가 찾을 수 있다. 영국이 홍콩을 점령하고, 영국과 유럽에서 온 서양인들이 홍콩에 정착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홍콩의 덥고 습한 날씨에 적응하기 힘들어했다고 한다.


긴 여름과 늘 축축한 침대 시트, 곰팡이, 일상적으로 90퍼센트를 넘나드는 높은 습도……  머나먼 영국으로부터 건너 온 이들은 홍콩의 습한 기후에 적응하기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찾아간 곳이 바로 빅토리아 피크였다. 높은 곳이니, 낮은 곳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습하고, 좀 더 시원했다. 지금처럼 기분 좋은 산들 바람이 솔솔 불어왔을 테니까…… 


당시 피크로 올라가 별장이나 대저택을 짓고, 거주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총독부의 고관 대작들이거나 당대의 부유한 사업가들이었다고 한다. 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곳에 거주하고 있는 이들은 여전히 홍콩의 상류층 부호들이다. 


빅토리아 피크에 올라가는 방법 중 가장 전통적이면서도 멋진 방법은 센트럴에서 피크 트램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다. 영국 식민지 당시부터 운행되었던 피크 트램은 여전히 같은 선로를 따라 옛날 방식 그대로 가파른 산비탈을 오르고 있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당시에는 50센트에 불과했던 요금이 현재는 왕복으로 40 달러(HKD)나 되었다는 점, 그리고 당시에는 총독을 위해 항시 비워두어야 했던 트램의 맨 앞 좌석이 현재는 가장 재빠른 여행자의 차지라는 점이다. 




피크 트램은 단 10 여분만에 ‘슈웅’하고, 가파른 산비탈을 순식간에 올라 빅토리아 피크 정상에 도착한다. 트램을 타기 위해 수많은 인파 속에 1시간 이상 기다려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허망할 만큼 빠르게, 그리고 손쉽게 정상에 오르고 만다. 


모두가 ‘어……’하는 순간에 피크 트램은 이미 정상에 도착해 있었다. 약간 허망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홍콩의 피크 트램을 타고 빅토리아 피크에 올라가는 일은 일생에 꼭 한 번해 볼만한 특별한 경험이기도 하다.


하지만, 단지 피크에 오르기 위한 목적이라면, 피크 트램을 기다려 타는 것보다는 택시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 훨씬 편리하다. 나는 홍콩에 살면서 피크 트램을 이미 여러 번 타 본 경험이 있어 이번에는 굳이 오랜 시간을 기다려 트램을 타기 보다는 택시를 타고 피크 정상으로 향했다. 


빅토리아 피크의 정상에 도착하니, 3시가 조금 지난 늦은 오후 시간이었다. 오늘처럼 산들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는 날이라면, 나는 언제라도 정상에 올라 피크 주변을 감싸고 도는 모닝트레일을 산책하곤 했다. 무더운 여름만 아니라면, 피크를 산책하기에 이 늦은 오후 무렵의 시간이 가장 좋았다. 





피크 주변을 한 바퀴 돌아가는 1.8 km 의 산책 코스인 모닝트레일은 1시간 정도 가볍게 산책하기에 알맞은 코스다. 


굴곡 없이 평이한 코스로 되어 있어 부담 없이 걷기에 좋고, 게다가 홍콩의 멋진 풍경을 360도 한 바퀴 돌아가며 차례로 보여주니, 홍콩섬과 빅토리아 하버의 전망을 감상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코스도 없다.


뤼가드 로드에서 시작되는 이 산책 코스는 홍콩섬 센트럴의 마천루 숲에서 시작하여 홍콩섬의 서편을 돌아 홍콩섬 남쪽 바다의 멋진 풍경까지 골고루 보여준다. 


홍콩섬의 마천루 숲을 저 아래 두고, 구름 위를 따라 걷는 이 기분, 게다가 안성 맞춤의 산들 바람마저 불어온다면, 이보다 더 멋진 산책이 또 있을까? 






그렇게 상쾌한 마음으로 1시간 정도 산책하고 돌아와 피크 타워의 전망 좋은 카페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나면, 이제 서편 하늘이 조금씩 붉어지며, 석양이 지기 시작한다. 


홍콩의 석양은 유달리 붉고 강렬하다. 파란 하늘에 붉은 기운이 점차 번져가며 끝내는 홍콩섬 남쪽 바다 전체를 붉게 물들여가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속에 잔잔한 여운이 남는다. 그리고, 그 여운이 가시기 전에 피크 타워의 전망대에 올라가 본다. 





홍콩의 하늘과 바다를 온통 물들인 붉은 기운이 점차 사라지고, 깜깜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홍콩은 다시 한번 옷을 갈아입는다. 이제 시작되는 것은 화려한 빛의 잔치.  


홍콩섬에 빼곡히 들어 찬 수 많은 빌딩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며, 화려한 빛을 발산하기 시작한다. 마치, 거대한 우주에 뿌려진 수많은 별들처럼 홍콩의 밤은 이미 화려한 별천지가 되어 있다. 


요즘은 상해의 야경도 멋지고, 싱가포르의 야경도 멋지다고 소문이 자자하지만, 본래부터 ‘백만 불 야경’의 원조는 홍콩이었다. 


홍콩의 야경에는 다른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홍콩만의 세련된 아름다움과 멋스러움이 있다. 현대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멋진 인공의 걸작품, 바로 홍콩섬의 백만 불 야경이다. 


나는 빅토리아 피크에 올라 홍콩의 야경을 볼 때마다 늘 그런 생각을 했다. 





오늘처럼 산들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는 늦은 오후, 빅토리아 피크에 올라 구름 위의 산책을 한다. 그리고 운 좋게도 때가 맞는다면, 멋진 석양을 감상하고, 홍콩 야경의 화려한 빛의 잔치를 감상한다. 


이 반나절의 짧은 여정만으로도 홍콩은 이미 당신의 인생에 가장 멋진 기억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나에게도 역시 이 짧은 반나절의 여정은 그렇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글/사진) Tripp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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