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취

기억을 걷는 시간

by 윤현섭

오늘 넌 새벽 6시쯤 일어나서 겨우 세수만 한 채로 지하철에 올랐어. 당장이라도 꺾여버릴 것 같은 무거운 다리를 끌고. 사람들로 가득 찬 출근길 지하철에서 앉아 가는 행운은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이 아니잖아. 얼굴을 가리기 위해 쓴 마스크 안으로 시큼한 냄새가 올라오지 않았어? 전날 먹은 걸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지. 뇌를 알코올에 절여버린다는 각오로 마셨잖아. 그나저나 소주 딱 한 병만 마신다고 했던 말 기억나? 그런 적이 없다며 잡아떼진 마. 영업시간 막바지에 들어온 귀찮은 손님을 상대했던 사장님도 똑똑히 들었어. "이봐요. 젊은 양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먹고 빨리 들어가요. 나도 정리하고 집에 가야지." 넌 구운 꼼장어 조각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느닷없이 울기 시작했어. "아무리 맛있어도 그렇지 울 정도는 아니잖아." 사장님의 넉살에도 한번 시작된 눈물은 멈출 줄 몰랐지. 그러게 내가 경고했잖아.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과 멀어지라고. '불편하지 않아? 젓가락 그렇게 잡으면 복 달아난데.' 그런 구닥다리 멘트 따위가 무슨 대수야? 젓가락질 잘해야만 밥 먹는 거 아니라는 노래도 있잖아. 이젠 옆에서 널 세심하게 챙겨줄 사람은 없어. 빨리 익숙해져. 네가 항상 얘기했잖아. 그게 무엇이든 2주 정도면 적응할 수 있다고. 아무리 아픈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는 법이니까. 이번에는 좀 다를 것 같다고? 정말 궁상이다. 알겠어. 이번만 특별히 6개월의 시간을 줄게. 오늘이 8월 2일이니까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는 아주 긴 시간이지.

6개월 후의 나야 잘 지내고 있어? 그곳에선 네가 어떤 하루를 사는지 너무 궁금해. 제발 부탁인데, 전혀 달라진 게 없다고 얘기하진 말아 줘. 주말에 일찍 일어나 수영하고, 책도 많이 읽고,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만나보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때쯤이면 그 사람이 쓰던 물건은 다 처리했겠지? 혹시 하나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가차 없이 끊어버려. 그게 트리거가 돼서 얼마나 널 우울하게 만들지 잘 알잖아. 역시 제일 좋은 건 사는 곳을 완전히 바꾸는 일이지만, 그게 어렵다면 작은 것부터 하나씩 시도해 보자. 우선 커피를 끊어봐. 너도 알다시피 향과 결합된 기억은 몇 배나 강력하잖아. 나도 알아 담배를 끊는 것만큼 힘든 일이라는 거.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지. 이제 아침마다 정성껏 커피 원두를 갈아서 내려줄 사람은 없잖아. 대신 날씨가 많이 추우니까 차를 마셔보자. 참! 레몬차는 피해야 해. 언젠가 한 모금 먹고 이런 걸 왜 먹냐며 잔뜩 얼굴을 찌푸린 그 모습이 떠오를 수도 있잖아. 그리고 가급적 국물 음식은 피하자. 설렁탕, 순댓국, 마라탕, 육개장, 샤브샤브 같은 거 먹을 때마다 행복해하던 사람이었잖아. 마지막으로 이게 제일 중요해. 설마 지금까지도 그 우울한 플레이리스트를 간직한 건 아니겠지? 첫 번째 곡부터 그게 뭐니.


아직도 너의 소리를 듣고 아직도 너의 손길을 느껴 오늘도 난 너의 흔적 안에 살았죠 길가에 덩그러니 놓여진 저 의자 위에도 물을 마시려 무심코 집어든 유리잔 안에도 나를 바라보기 위해 마주한 그 거울 속에도 귓가에 살며시 내려앉은 음악 속에도 니가 있어 어떤가요 그댄 당신도 나와 같나요


유치한 가사나 곱씹으면서 목숨보다 소중한 기억을 걷어낼 수 있을 것 같아? 착각하지 마. 오히려 눈이 펑펑 내리는 2월 어느 날 그 사람이 새겨놓은 기억 안에서 끝없이 걷고 있는 나를 만나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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