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5

코비, 출근하다.

by 코비

침투 5일째.

오늘부터는 회사에 가야해.

남들 하는대로 공무원증을 게이트에 찍으니 문이 열리더군.

인간이 알려준 대로 "내 자리"라는 곳에 가서 앉았고.

근데 이제 뭘 하면 되는 거지?

침투 전 교육에 의하면 회사라는 곳은 상급자가 시키는 것을 하면 되는 곳이라고 들었다만.

일단 앉아있자. 곧 나에게 일을 시키겠지?


하지만 30분이 지나도, 아무도 나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않아.

도대체 이제 뭘 하면 되지? 그래, 인터넷에서 찾아봐야겠어.

인간들의 검색엔진 "구글"을 켜고 "회사에 갔는데 아무도 일을 안 시킴"을 치려는 찰나.


"전 사무관"

날 부르는 건가?

"어..네?"

"그동안 잘 쉬었어? 국장님께 OO 활성화방안 보고 드린다고 했던거 있잖아. 그거 얼마나 됐을까?"

"어... 음... 얼마나요?"

"그래, 준비 다 되면 보여주고."

"네"


자리에 와서 앉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어. 원래 몸의 주인한테 물어봐야겠어.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멀리서 하얀 방이 점점 가까워지더군.

나는 자고 있는 인간을 흔들어 깨웠어.


"인간. OO활성화 방안이 뭐냐? 보고는 또 뭐고?"


"아... OO활성화 방안이요. 과장님이 보고 시키셨어요? 음... 보고는 문제해결하는 거예요."


"문제 해결?"


"네. 그러니까 뭐가 잘 안되고 있잖아요? 그럼 그건 문제가 있는거죠. 그 문제가 뭔지 찾아내고, 그 문제에 맞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문제 해결과정'이 '보고'예요. 그러니까 보고를 잘하려면 ① 사안을 잘 파악하고, ② 무엇이 문제인지, 문제를 잘 정의하고, ③ 현상을 잘 진단해서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해요."


"너무 어려운데."


"음, 예를 들면요, 사람은 열 명인데 아이스크림은 다섯 개밖에 없어요. 그래서 열 명이서 싸움이 붙었어요. 문제상황이죠? 우리가 원하는 건 아이스크림을 둘러싼 다툼이 사라지는 거고요."


인간은 바닥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어.


Ⅰ. 검토배경
ㅇ 최근 희소자원인 아이스크림을 둘러싼 분쟁 발생건수가 증가추세에 있으며, ~를 계기로 분쟁 격화


"그런데?"


"그럼 이 문제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겠어요? 먼저 문제를 정의해야 해요. 문제를 정의하는 건 간단하지 않아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아이스크림 자체가 부족한게 문제일 수도 있고, 그래서 아이스크림 다섯 개를 다른데서 가져오면 해결되는 문제일 수도 있고요. 또 다섯 개의 아이스크림을 분배할 명확한 기준이 없는 게 문제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내가 "이게 문제다!"라고 규정하기 전에, 밑밥을 까는 것이 '현황'이고요.


Ⅱ. 현황 및 문제점
ㅇ(현황) 사람 수(10명)에 비해 아이스크림 수량(5명)이 부족하여 품귀현상 발생
ㅇ(문제점) 희소자원인 아이스크림을 배분할 기준 및 배분주체 부재


"그리고 이 현황 및 문제점을 토대로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거예요. 이렇게요."


Ⅲ. 해결방안
ㅇ (배분기준) 매일 9시 번호표 배부 후 선착순 배분
ㅇ (배분주체) 아이스크림 당번 지정 후 배부권한 부여


"마지막으로 중요한 건 실행이에요. 추진계획을 제시해야 이 모든게 말장난으로 끝나지 않아요."


Ⅳ. 추진계획
ㅇ 배분기준 홍보('22.12월)
ㅇ 배분주체 선정('23.1월)


"흠 그렇군. 근데, 보고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는거? 사실 보는 관점에 따라 무엇이 문제인지는 달라질 수 있는데, 내가 얼마나 사실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느냐, 얼마나 다양한 관점을 고려하느냐에 따라 해결방안의 수준이 달라지죠. 그래서 사무관의 역량이 문제 진단 능력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러니까 최대한 많은 자료를 얻어내고, 집요할 정도로 많은 질문을 하고, 최대한 문제를 복합적으로 볼 수 있게 노력하는 게 제일 중요해요."


"쉽진 않겠네."


"마지막으로 내 생각을 아름다운 틀에 집어넣는거. 큼직큼직한 글씨로, 눈에 거슬리는 거 없이 물 흐르듯 읽힐 수 있게 만드는게 중요해요. 왜냐면, 우리 역할은 윗사람들의 생각자원을 아끼게 해주는 거니까."


"생각자원?"


"네. 저는 한 명이지만, 과장님은 사무관 네 명을 상대하잖아요. 국장님은 스무 명을 상대하고요, 실장님은 백 명을 상대하고요. 그러니까 윗사람일수록 다양한 테마로 하루종일 시달리면서 계속 의사결정을 해야 하니까. 최대한 거슬리지 않게, 깊게 생각하지 않고도 물흐르듯 읽게 쓰는게 중요하죠. 그러니까 포맷도 중요하다."


"포맷."


"사실 보고서 쓰기 어렵다는 사람들 보면, 포맷 맞추는게 어렵다는 사람도 많아요. 근데 포맷이라는건 선배들 보고서 계속 보고, 내 보고서도 계속 쓰다보면 그냥 몸에 익으니까. 나중에 보면 형식맞추는게 제일 쉬운 거구요. 깊게 생각하는게 제일 어렵구요. 뭐 그렇죠. 근데 외계인이시니까 생각 깊으셔서 더 잘 하실듯?"


"흠 알았다."


그 때였다. 툭툭 방이 울리기 시작한 것은. 정신이 퍼뜩 들었지. 눈을 뜨니 과장이 날 흔들고 있더군.


"전사무관. 괜찮아? 뭐 하는거야? 더 쉬어야 하는거 아냐?"


"괜찮습니다. 브레인 포그라고, 머리에 안개가 낀 것처럼 멍한 느낌이 지속되어 사고력과 집중력, 기억력이 저하되고 멍때리는 건 코로나19의 가장 흔한 임상증세 중 하나죠."


"안 괜찮은 거 같은데? 점심시간이야. 식사 맛있게 하고."


한글의 커서는 계속 깜박이고 있더군.

흠..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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