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찬우 Dec 18. 2020

새벽에는 인스타그램을 삭제하세요

못 볼 걸 보게 됩니다

새벽만 되면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 된다. 창밖의 색깔이 바뀌고 주변이 훨씬 조용해졌을 뿐인 이 시간대는 매번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몰고 온다. 나만 그런 걸까.


인스타그램을 켠다. 항간에는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트위터는 '내가 이렇게 이상하다'를, 블로그는 '내가 이렇게 전문적이다'를, 인스타그램은 '내가 이렇게 잘 먹고 있다'를 말하는 곳이라고. 하지만 내 뉴스피드에는 음식보다는 다양한 타인의 행복이 전시되어 있다. 스스로가 행복하지 않다고 느껴서 그런 게시물만 보이는 것일까. 유독 눈길을 끄는 몇몇 지인들의 포스팅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어 어플을 종료한다. '좋아요'나 댓글과 같은 흔적은 남기지 않았다. 인정하긴 싫지만 샘이 나서 그렇다. 가슴 한쪽이 아려온다.



한때는 매일 게시물을 올릴 정도로 인스타그램에 중독되어 있었다. 내 삶에는 자랑할만한 게 너무나 많았고 누군가 이런 나를 보며 부러워하길 바란 것일지도 모른다. 소위 말하는 '인싸'의 대열에 끼고 싶었을지도. 그렇게 나는 딱히 할 게 없을 때면 무의식적으로 인스타그램을 켰고 이름도 모르는 팔로워들의 일상을 구경했다. 당시 내 SNS 일일 평균 이용량은 50분에 가까웠다. 자그마치 하루의 1/24을 이 작고 네모난 화면 안에 소모한 것이다. 인터넷 상에서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따른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 허상이 좋았다.




인스타그램은 나를 포장하는 용도로도 탁월한 효능을 보였다. 자기 PR 시대라는 말이 구시대 유물처럼 느껴질 정도로 소셜 미디어란 그 어떤 자기소개서보다 나를 잘 표현하는 매개체였다. 내가 이런 음식을 먹고, 이런 옷을 입으며, 이런 공간을 방문했다는 것을 은근슬쩍 전시하며 또 하나의 나(아바타)를 만들 수 있었다. 실제로 나는 그리 부유하지도, 세련되지도, 지적이지도 않은 사람이었지만 내 틀에 박힌 단편을 엿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를 멋진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이러한 위장은 현실 세계로도 연장되었다. 이제 인터넷 세상은 하나의 개별적인 공간을 넘어선 시대가 되었고 사람들은 은연중에 각자의 SNS를 통해 현실에서도 본인만의 아우라를 만들어냈다. 누군가의 첫인상을 인스타그램을 통해 인지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나는 몇 가지 수혜를 입기도 했다. 반대로 인스타그램을 통해 누군가를 사랑하기도 했다. 어느덧 피드와 팔로워 수는 개인의 매력도를 측정하는 데이터가 된 것이다.



문제는 '유한함'이었다. 여타 다른 플랫폼이 그래 왔듯 인스타그램도 여러 변화를 맞이했다. 정방향의 사진과 #mood 캡션 하나를 달랑 게시하던 힙스터의 상징은 이제 누구나 하나쯤 계정을 소유하게 된 '당연한' 소통 창구가 되었고 싸이월드가 그랬듯, 페이스북이 그랬듯 이 공간도 더 이상 '소셜'하지 않았다. 그저 네트워크만 남았을 뿐. 누구보다 방대한 연결을 자랑했던 인스타그램은 아이러니하게도 갈수록 폐쇄성이 짙어졌다. 사람들은 '멀티 페르소나'라는 멋들어진 방패를 들고 부계정을 만들어 지인들을 염탐하기 시작했고 누구나 볼 수 있는 포스팅보다는 방문자를 확인할 수 있는 스토리에 촉을 세웠다.


빨간 하트는 점점 사라졌다. 계정 옆에 유명인임을 증명하는 파란 체크가 달리지 않은 이의 게시물은 금방 휘발되었고 해시태그는 광고로 도배되었다. 브랜디드 콘텐츠라는 이름으로 스폰서드 계정들이 범람했고 최근에는 가장 오랫동안 위치했기에 시선이 고정되었던 우하단의 '좋아요' 확인 란이 쇼핑 카테고리로 바뀌었다. 명백하게 이커머스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업데이트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불만을 표출했고 나는 '통섭'이란 단어는 어쩌면 아직도 많은 제약을 가진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인스타그램에 지쳐가기 시작했다. 알고리즘과 서비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 일상을 공유하는 동시에 남의 일상을 봐야 한다는 원초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행복하고 멋진 삶을 살아가고 있던 때와 달리 지금의 나는 너무나 고단한 현생을 살아가고 있으며 어느 시기에는 인스타그램을 켜 볼 도 없이 바빴다. 가끔 보게 되는 최상단의 몇몇 게시물들에 짜증이 치밀었고 일일 평균 사용량은 2분대로 급격하게 추락했다. 언젠가 인스타그램 계정을 삭제해 행복하다는 한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또한, 술에 잔뜩 취했거나 마음이 와장창 깨진 날에 켠 인스타그램은 다른 의미로 독한 술과 같았다. 기억나는 대로 전 여자 친구들의 계정을 찾아 나섰고 적이라고 생각하는 인간들의 업데이트된 행복을 확인하고자 손가락을 바쁘게 놀렸다. 하지만 인스타그램이 어떤 곳인가. 여기는 행복한 사람들만 살아남는 곳이다. 환승 이별로 나와 헤어졌던 여섯 번째 여자 친구는 행복에 겨워하는 커플 사진을 12주 전에 포스팅했고 세상의 그 어떤 사람보다 개새끼임이 확실해 보였던 내 적 중 하나는 많은 돈을 번 것처럼 보였다. 나는 혹시나 더블 탭으로 '좋아요'의 흔적을 남길까 싶어 사진 확대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 외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계정을 비공개했다. 프라이버시에 예민함을 보이는 사람일 수도, 혹은 그저 나만 차단이 되었을 수도 있다. 우리가 '맞팔'이었을 때야 서로의 포스팅을 넘나드는 일이 자유로웠지 남남이 된 지금의 우리는 각자의 일상을 확인하는 행위에도 냉혹한 허락을 구해야만 했다. 이것은 일종의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 '너의 행복을 보게 된다면 내가 불행 해질 테니, 너도 내 일상을 염탐하지 마!' 비슷하게도 나는 오히려 그러한 점을 역이용해 일부러 내 계정을 비공개로 전환하지 않는 극악무도함을 설계했다. 그들이 나를 향해 끊임없는 내적 열등감을 느끼길 바랐다. 언젠가 내 스토리에 찍힌 몇몇 전 여자 친구와 적들을 확인하자 아직도 내 삶을 팔로우 업 하는 그들에게 무언가 짜릿한 복수에 성공했다는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인스타그램을 공격과 배설의 장소로 이용했다. 항상 사랑이, 행복이 최고의 가치라고 말하던 내가 간접적으로나마 누군가의 감정에 흠집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또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심지어는 제발 얼른 다치라고 외치는 것처럼 행동했다.




결국 이 모든 게 비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애석한 말이지만 나와 같이 감정선이 연약한 사람들은 인스타그램을 장기간 붙잡아선 안된다. 특히 새벽 시간대에는 잠시라도 삭제를 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전 연인이든, 적이든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감정 낭비를 최대한 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황에 놓인 경우, 모든 커뮤니티를 원천 차단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다. 내가 과거에 헤어진 여자 친구들에게 미련을 담은 메시지나 전화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외우지도 못했던 그녀들의 전화번호를 모조리 삭제하고 SNS 계정 전부를 차단함에 처박아버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수 딘(DEAN)의 메가 히트곡인 <instagram>에는 이런 노랫말이 있다.


"관둘래. 이 놈의 정보화 시대. 단단히 잘못됐어. 요즘은 아는 게 더 괴로운 것 같은데."


인스타그램의 맹점을 정확하게 찌르는 가사다. 수많은 정보와 정보가 연결되어 있는 인터넷. 그중에서도 현시점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행복을 쉽게 헤아리는 용도로 사용하는 인스타그램. 이 공간은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일 때가 왕왕 있다. 명쾌하게 모든 것을 알았다면 쉽게 미련을 버릴 수 있을 텐데, 인스타그램 속의 피드는 단편적이기에 애매한 표현력을 가진다. 애매하게 아는 것은 더부룩한 체기를 부른다. 또, 더러 나처럼 그러한 애매함을 악용하는 사람들에게 잘못 걸린다면 정신 상태는 쥐어짠 빨래처럼 너부러진다.


그래서 나는 오롯한 관심을 보이는 팔로워들에게 집중하고자 한다. 내 포스팅에 꾸준히 하트를 보내는 혈관 같은 사람들에 감사함을 느끼고 스토리를 방문한 무수한 타인들 속 무심코 지나친 평범한 지인들의 행복을 스키밍 하고자 한다. 내가 그토록 열망하던 사람의 흔적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꾸준히 내 일상에 지지를 보낸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고자 한다. 사람들은 의외로 내게 관심이 없다는 말은 사실 의외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음에 주목하고자 한다. '좋아요'를 누르기에 조금 어색하고 웃긴 사이지만 조금이나마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관심에 보답하고자 한다.


비록 급작스럽게 맞닥뜨린 새벽 앞에 이 다짐은 모래성처럼 부서지곤 하지만 나는 나름의 절충안을 잘 찾아온 것 같다. 그러니 7년이 넘게 이 계정을 유지할 수 있었겠지. 물론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나는 인스타그램이라는 바다에 정처 없이 표류하는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 아문센이 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내가 제일 잘 알아 : 조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