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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Dec 15. 2020

나는 내가 제일 잘 알아 : 조연

주인공은 내가 아니다

이번 달의 내 기운이 좋지 못하다고 한다. 하는 일마다 전부 실패하고 몸과 정신이 괴로우니 스스로를 잘 추스르라는 여덟 줄 남짓의 오늘의 운세를 읽다 덜컥 겁이 났다. 나 이런 거 잘 믿는 사람인데. 괜히 읽었다.


문제는 이러한 불행의 사주는 곧잘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대학 시절, 재미로 종종 타로나 사주를 보러 가자는 친구들이 한 말은 틀렸다. 내 경우에 길한 점은 단 한 번도 들어맞은 적이 없으며 흉한 점은 모조리 적중했다. 내게 미신이란 하루를 즐겁게 점쳐보는 것이 아니라 내 불행한 미래에 확정 도장을 찍는 행위였다.


이 또한 결국 내 '마음가짐의 차이'라는 친한 친구의 충고는 결과적으로 옳았겠지만 한 번 흔들린 마음은 되돌아오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중요한 사건을 앞두고 있을 때면 누군가의 사소한 말과 행동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나만의 완강한 저항능력을 길렀다. 가족과 대화하지 않았고 메시지 알림음을 전부 꺼놨으며 무언가에 강한 강박증을 보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눈을 아래로 깔았다. 그 와중에도 바닥의 무늬를 세거나, 숨을 참거나, 가까운 미래를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는 행동까지는 막을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이러한 징크스는 꽤 효과가 있었고 나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숨어 살기 시작했다.




아주 예민한 내 성격의 문제도 있겠지만 나는 이러한 사고 과정의 원인이 모두 '언어'에서 시발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말의 힘을 절실히 이해하는 사람이면서도 그 안에 깊숙이 갇혀있곤 했다. 아들, 학생, 연인, 사회인 등의 단어는 어떤 소속감을 준 동시에 나를 꽁꽁 묶었다.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사람이란 것에 무의식적인 반발심이 생긴 건 이후였다. 나는 내가 제일 잘 아는데. 이걸 말로 설명할 길이 없어 언어 안에 갇혀왔다.


삶은 모두 경쟁이라고. 결과적으로 이 세상은 승자만이 기억되고 기록되는 뻔한 시나리오임을 알면서도 부정해온 것이다. 언제나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지극히 당연한 말에 종속되어서 일까. 나는 주변인의 서사에 무지했고 무관심했으나 사람에게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여왔다. 당장 영화 한 편을 봐도 주인공으로 표시된 배역은 단 한 사람뿐인데 말이다.


5:1의 면접 경쟁을 뚫는 것도,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을 쟁취하는 것도, 좋은 미래를 보장받는 삶도 결국 모든 이들이 간절하게 원하는 주인공의 '정답'이다. 나를 포함해 대다수의 사람은 그러한 정답의 근처에서 서성거리다 잦은 실패를 맛본다. 그것에 익숙해지고 나서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된다. 내 삶의 주인공은 사실 내가 아니구나. 어쩌면 극소수의 주인공을 조명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99의 사람들을 자양분으로 삼은 건 아닐까. 내가 이뤄온 보잘것없는 몇 개의 성공 조차도 누군가의 큰 실패들을 제물로 삼아 이뤄낸 것은 아닐까. 잠시간 훈훈한 내러티브에 정답을 솎아내던 미디어를 탓하게 된다.




이건 마치 자기 계발서와 같은 것이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된다. 이 별것 없는 말 때문에 벽에 부딪힌 사람들의 실패는 가치를 잃어버린다. 개천에서 용 나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은 이제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이 동의하는 부분임에도 왜인지 노력의 크기는 여전히 재단하려고만 든다. '될놈될'과 같은 엘리트주의에 낙담하듯 인정의 손을 들어 올리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일까.


그렇게 나는 조연의 삶을 인정하기로 했다. 나에게는 별다른 재능이 없었다. 남들과 엇비슷하게 살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쳐왔으나 그다지 실속이 없었고 객관적인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아주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몇 년의 세월을 낭비해왔다. 끊임없이 낭만을 가지며 살라고 외쳤지만, 그보다 지난한 삶을 살아온 것처럼 보이는 주변인들에 비해 삶을 드라마틱하게 살아오지도 않았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범인들의 삶. 나는 타인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약간 더 예민한 감성을 가지고 있는.


주목받는 삶이 내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나 보다. 도화격의 사주를 가진 사람답게 천상 연예인의 삶을 동경해온 것일까. 그들이 가진 괴로움은 최대한 무시하며 당장 손에 거머쥔 화려한 성공을 내 것이라고 착각했다. 구체적인 목표와 과정은 없이 '나는 당연히 잘 될 사람이다'라고 자기 암시를 걸어온 것이다. 세상은 그보다 냉혹하고 더러운 곳임을 알기에는 6개월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내 부모님은 어떤 인생을 살아온 것일까.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꿈이 커야 깨져도 그 조각이 크다. 나는 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서울대를 목표로 해야 서성한 정도를 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나쁜 처방전이다. 그것은 꿈이 아닌 장래희망에 불과하다. 유리처럼 깨진 건 그냥 깨진 것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꿈은 종이 접기와 같다고 생각한다. 접었던 꿈도 언젠가는 펼쳐볼 수 있도록. 혹은 진짜로 놓아줘야 할 꿈에 깨진 조각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비행기 모양으로 접어 멀리 날려 보낼 수 있도록 말이다. 


고작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으로 측정된 나쁜 사주가 여태 높은 정답률을 보인 것처럼, 아마도 이번 달의 나는 괴로운 서사로 한 해를 마무리하지 않을까 싶다. 당연히 그러한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싶지만 당장 코 앞으로 다가온다면 이를 위한 방비책이 있어야 한다. 더 이상 마모될 것 없어 보이는 감정에도 새살은 돋아나니까. 다만 주인공이 아니었을 뿐 조연으로서 나도 나름의 기승전결을 가졌으니까. 나는 '인정'이라는 백신을 꾸준히 투약하기 시작했다. 효과가 있을지는 남은 15여 일을 겪어봐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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