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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Nov 28. 2020

우리 모두 거리두기에 실패했다

싸돌아다닌 남이 아닌 집콕의 나부터

코로나가 다시 폭발적인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올해 1월, 헬스장의 TV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중국발의 바이러스는 1년이 다 지나가는 지금 시점에서도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 세정제는 일상용품이 되었고 어느 거리를 나가든 사람들의 코와 입은 각양각색의 마스크로 가려져있다.



당연하게도 마스크를 쓰지 않거나 어설프게 쓰는 행위는 지탄받게 되었다. 주로 연배가 있는 어르신들이 지하철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마스크 미착용과 관련된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또 하나, 세대 경계를 타지 않고 지적받는 지점이 있다. 바로 최근의 여러 집회, 여행, 핼러윈 파티와 같이 대대적인 자제를 요청받는 '외출'이다. 인류는 언제나 사회적 연결을 중요시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는 분명 어쩔 수 없는 사회 구성의 일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말한다. "제발 집에 좀 처박혀 계세요!"




이러한 사회적 합의에는 물론 동의한다. 하지만 이 '집콕'에도 내로남불이 있다는 점은 의아하다. 우리는 '가능한' 집에 머물며 바이러스의 확산을 방지하자 말하면서도 개인의 일상을 완전히 포기하고 있진 않다. 지금 당장에야 거주 시간이 늘어나는 지표를 확인할 수 있겠지만 이 기간이 막연해질수록 '벗어남'은 당연한 수순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거리두기의 실패를 외출자들에게 덤터기를 씌우는 행태들이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한다. 당장 그런 악플을 남기는 사람들 또한 24시간을 온전히 집에서 보내고 있진 않을 테니 말이다.


우리의 인스타그램을 열어보자. 지금도 내 피드에는 본인의 맨얼굴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지인들이 수십 명이나 있다. 물론 개중에는 마스크를 쓰고 있거나 본인의 집에서 찍은 '안전한 사진'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연예인과 같이 '공인'이라는 아이러니한 약칭 안에 갇힌 인물들이었다면 분명 비판을 받았을만한 사진들도 꽤 많다. 이 자랑과 일상의 공간에서 우리는 '비대면 초연결'이라는 이름 하에 코로나 팬데믹을 완곡하게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딘가 불편하지 않은가?


다시, 이번엔 우리의 페이스북과 네이버 검색창을 열어보자. 오늘 하루만 해도 504명의 확진자가 나타났다. 안타까운 뉴스다.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 싸움을 이겨내고 있는 우리들을 돌아보게 된다. '덕분에 챌린지'와 같은 의료진들을 향한 열렬한 응원도 이어진다. 그렇다면 페이스북 속 가십형 아티클의 댓글들은 어떨까? 코로나임에도 추석 명절을 활용한 여행객, 핼러윈 코스프레를 즐기는 자타칭 '인싸'들, 본사에 확진자가 나타났음에도 가동라인을 멈추지 않는 몇몇 기업들을 다루는 기사에는 지금도 수천 개의 댓글이 달리고 있다.


"우리만 방역 원칙 준수하나? 너네 같은 새끼들 때문에 가만히 있는 우리가 피해받는 거야!"

"진짜 이 시국에 싸돌아다니는 거 보면 같은 1표가 맞나 싶다."

"누구는 못 놀아서 안 나가는 줄 아나. 진짜 이기적이네."



언어를 대체로 순화해서 이렇게 썼지 실제로는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참혹한 댓글들이 대부분이다. 코로나가 우리의 물리적 거리를 폐쇄적으로 만들면서 성격까지도 그렇게 만든 걸까. 지금 사람들은 '외출'에 있어서 지나친 예민함을 보인다. 코로나 시대에 '싸돌아 다님'은 본인을 '악'이라고 정의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의로운' 우리에게는 돌 던질 정도의 '자격'은 있지 않을까?




당연히 없다. 애초에 그럴 자격 자체가 존재하는 인간이 없을뿐더러 실제로 '집콕의 우리'는 '외출의 그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추석, 설 명절에 여행을 가는 것은 가부장적 문화가 옅어지기 시작하면서 생긴 당연한 변화였다. 다만 코로나가 그 범위를 제한시켰기 때문에 해외가 아닌 국내 여행지들로 눈이 돌아갔을 뿐이다. 당장에 우리 주변만 해도 코로나임에도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핼러윈 코스프레는 어떤가. 국가적 차원에서 제한으로 서울의 홍대나 이태원 같은 클럽 특구는 이용이 제한되었다. 참석자들은 마스크 착용을 강요당했고 이를 지키지 않는다면 법적 처벌을 감수해야 했다. 그렇다면 방역 원칙을 철저하게 지킨 이 '인싸'들의 죄는 도대체 무엇인가. '가능한' 외출을 자제하라는 말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왜 누군가의 '가능한'을 우리 멋대로 재단하는지 참 아리송하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림에도 자택 근무를 실시하지 않는 기업들은 또 어떤가.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에게 무차별적인 윤리적 잣대를 들이미는 행위들은 벽과 대화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실제로 자택 근무만으로 사업 프로세스가 돌아가는 직업은 정말 제한적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럴 거면 버스도, 지하철도, 개인택시도, 카페도 전부 영업 정지해야 합당한 게 아닌가. 그리고 애초에 기업들은 더 철저한 방역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다만 다른 집단에 비해 사람이 더 많을 뿐이고 그만큼 확진자가 나올 확률도 높은 것일 뿐.


그래서 나는 지금의 거리두기 실패를 우리 모두의 실패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남 탓이 아니라 내 탓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잔인하고 어리석은 말처럼 들리겠지만 또, 이것 마저도 하나의 엘리트주의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집콕의 우리가 외출의 그들을 욕하는 것은 단편적인 선민의식에 불과하다. "가만히 집에 좀 처박혀 계세요!" 이전에 외쳐야 할 선언은 "나도 그랬지 않았을까?"여야 한다.




14세기 전 유럽의 대규모 인구 손실을 만든 페스트는 그 파괴력에도 불구하고 문화 융성의 르네상스를 만들었다. 이전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던 그들이 고작 쥐 따위가 옮기는 전염병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변화였을 지도 모른다. 신을 믿을 수 없다 여겼던 그들은 방향을 바꿔 그들 스스로를 믿는 인간 탐구의 과정을 거쳤고 사람을 죽이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은 역설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문화를 만들어냈다.



나는 지금의 코로나 팬데믹이 그러한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비대면 채널이니, 언택트 플랫폼이니 하는 '거리두기'의 일환이 아닌 그 속에서 우리의 인력을 강하게 발휘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내는 노력 말이다. 멀어지고 벌리는 것은 단적인 해결책일 뿐이다. 분명 이 시기는 언젠가 끝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지속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막연한 미래를 대비하고 있는 우리가 조명해야 할 것은 서로에 대한 혐오와 지적, 비합리적 비난이 아닌 '사랑'이다. 물리적으로 더 멀어지려 하는 우리를 내적으로 유대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감정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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