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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Dec 22. 2020

어른이 되면 왜 눈물이 줄어들까

나는 아니었으면

꽤 오래전부터 의문이 들었다. 사람들은 왜 이리 눈물에 야박할까. 네온사인이 사라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는 지금, 장시간 착용한 마스크에 코와 입이 불편하지만 불러본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서-언물을 안 주신대.


내 생각에 어른이 될수록 눈물이 줄어드는 가장 큰 이유는 '힘' 때문이다. 우리는 약자의 눈물에 주목해야 한다 말하면서도 그들이 눈물 흘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남들 앞에서 눈물을 숨기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을 '약자'라고 외치는 것과 진배없다. 한순간 그들을 위로하고 달래주려 눈물을 닦아주는 시늉을 건네지만 마음속에는 알게 모르게 이러한 파문이 인다. 얘 나보다 약한 사람이구나.


물론 오롯이 순수한 의도로 누군가의 눈물을 대신 훔쳐주는 사람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집에서조차 숨죽여 흐느껴본 사람들은 안다. 눈물은 최대한 숨겨야 한다는 것을.




컥, 훌쩍, 크흡, 우앙, 흑흑. 눈물에는 소리가 있다. 또한, 눈물에는 부정의 음계가 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우리가 녹음기를 통해 처음으로 청취하는 '남들이 평소에 듣는 진짜 내 목소리'에 큰 충격을 받는 것처럼 눈물의 소리에는 불편한 괴리감이 있다. 그러니 듣기 싫은 거다. 질질 짜 대는 소리에 짜증이 치민다. 또한, 사람이기에 느끼는 마음 어딘가를 찌르르 울리는 소리는 괜히 담배를 찾게 되고 한숨을 쉬게 만든다는 점에서 멀리하고 싶은 음정이기도 하다.


찔끔, 왈칵, 줄줄. 눈물에는 화면도 있다. 눈가에 작게 맺히는 눈물에는 기쁨, 행복, 슬픔, 분노, 억울함이 모두 담겨있다. 그래서 때때로 어떤 눈물은 아름답게 비친다. 하지만 대부분의 눈물은 추하다. 코가 나오고 얼굴이 붉어지며 이유는 모르겠지만 머리가 산발이 된다. 눈물을 대면해야 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갈 곳을 잃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지 우왕좌왕하며 눈치를 살핀다. 하지만 정작 눈은 피하고 만다. 그 화면에는 지금 당장 내가 감당하지 못할, 마주하지 못할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눈물에는 상상이 있다. 듣는 소리와 보는 화면의 너머,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의 서사가 있다. 이해할 수 없고 전혀 이해하려 해서도 안 되는 방대한 내러티브가 있다. 그들은 각자의 이야기 끝에 상주한 성취, 해소, 실패, 좌절의 결말을 몇 줄기의 눈물로 방점을 찍는다. 그러니 우리는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냥 이 사람이 너무도 약한 사람이라고. 누구나 이겨내는 것들을 물리적으로 드러내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눈물은 그런 것이었다. 특히 어른들에게는 득보다는 실이 많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눈물을 감추기 시작했다. 이불속에서, 화장실에서, 마음 안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프로세스를 만들었다. 강해져야 했기 때문이다. 사회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나는 얕보이지 않아야 하고 또, 그게 멋스러움의 표본이 되었다. 냉철한 지식인. 눈물은 동정을 부르고 강인함은 동경을 불렀다.


그렇게 눈물은 조금씩 무뎌져 갔다.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화 창안에 'ㅋㅋㅋ'을 연타하는 것처럼 'ㅠㅠㅠ'가 가진 근원의 힘을 줄여나갔다. 눈물은 정말 별거 아니라고 외쳤다. 우리 삶에 그리 슬픈 건 없다고. 모두 똑같다고. 어른이 되면 다 그런 것이라며 약효가 의심되는 진통제를 장기 투여했다.


그럴수록 눈물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틈새를 비집고 나왔다. 별 것 없는 제품 광고용 아티클에서 본 효도 콘텐츠에 눈물을 찔끔 흘리고, 신파 범벅이라며 욕하던 영화에서 샘이 터진다. 뭐가 그리 슬픈지 새벽만 되면 술에 만취해 전봇대나 나무를 붙잡고 대성통곡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도 있다. 아, 눈물은 정말 형용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애써 막으려 할수록 더욱 배가 되어 터져 나오는, 한숨과 같은 그 무엇.


나는 어른이 뭔지도 잘 모르지만, 남들이 나를 어른이라고 부르니 아마도 어른일 것이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서 눈물의 양이 확연히 줄었다. 특히 남들 앞에서는 절대 울지 않게 되었다. 눈물이 나지도 않았다. 그렇게 무덤덤해지고 무감각해졌다. 누군가의 비애를 들어도 그리 슬프지 않았다. 어느 순간에는 우는 것을 잊어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냉정해졌다. 그리고 나는 멋있어졌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




언젠가 어릴 적의 기억이다. 감수성이 풍부했고 툭하면 터질듯한 울음보를 상시 착용하던 그 시절의 나는 더는 나올 눈물이 없다고 생각할 만큼 꼭지가 터진 적이 있다. 눈물을 너무 흘려 눈가가 시뻘겠고 눈물의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으나 화를 동반한 눈물이었기에 머리가 매우 아팠으며 눈의 실핏줄은 죄다 터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잠시간 기절을 하기도 했다.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곧장 잠에 들었고 8시간을 내리 잤다. 이후의 기상은 개운치 못했고 내 방은 또 그대로 눈물바다가 됐다. 이러다 정말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 화장실로 기어갔는데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나 우스꽝스러웠다. 그런데 또, 그 장면에서 이유모를 눈물이 솟아났고 나는 울다 웃다를 반복했다. 그제야 나일강 같은 눈물도 멈췄다. 눈물을 직접 마주하고 보니 '사실 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깨달은 것이었다. 눈물은 해소와 귀찮음, 수치심 사이 어딘가에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누군가의 눈물을 억압의 용도로 사용하게 되었다. 여자 친구들의 눈물은 슬프지만 연애의 우위를 점하는 용도로 빈번하게 사용되었고 친구들의 눈물은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살면서 한 두 번 밖에 보지 못했던 부모님의 눈물은 절대 저렇게 되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내 DNA를 거부하게 만들었고 이름 모를 누군가의 눈물에는 나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반면교사로 사용했다. 나는 남의 눈물로 이득을 갈취했다.




다들 그렇게 산다고 생각했다. 팍팍한 세상이라고, 지난한 일상의 반복들이라고. 이곳에 감동이 없으니 눈물을 흘릴 일이 뭐가 있겠냐고 말하는 대중들에 동의했다. 눈물을 참는, 숨기는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했고 보란 듯이 이뤄냈다. 나는 이제 눈물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울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고.


하지만 내 속의 어딘가는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눈물을 너무 참아와서 일까. 내 마음속의 댐에도 방류가 필요한 시기가 찾아왔다. 두 달 전, 가까운 사람의 투병 소식에 심적으로 매우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다 만나게 된 친한 친구 한 명이 별 뜻 없이 건넨 위로에 갑자기 눈앞이 먹먹해졌다. 희뿌연 안개가 안경을 뒤덮었고 많은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꺼이꺼이 울어버렸다. 친구는 무너지는 표정과 함께 나를 응원했다. 나는 그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그도 내가 멋있다고 했다.


그리고 바로 어제, 코로나 블루 때문인지 연말의 분위기 때문인지 홀로 돌아가는 귀갓길에 뜬금없는 외로움을 느껴 길가에서 펑펑 울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이번에는 등을 두드려줄 친구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사람도 없지만 부끄러웠다. 혼자만 어른이 되지 못한 것 같았다. 이제는 산타의 선물을 희망하는 아이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울지 말아야 할 어른의 서사를 나는 갖지 못한 것 같았다. 어른이 되면 왜 눈물이 줄어들까. 이 질문에 답변을 머뭇거리는 나는 어쩌면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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