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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Jan 17. 2021

다음 거

시제의 존재 이유

퇴근 후 오래간만에 치킨에 소맥을 마셨다. 내 유일한 술친구인 5가 이번에도 함께 했다는 점에서 우리 사이는 변한 게 없지만 한 달 내외의 짧은 기간 동안 각자의 일상은 확연히 변했다. 우선 21개월의 기나긴 취업 준비 기간 끝에 간신히 괜찮은 회사에 입사한 나와 단 한 장의 자기소개서로 졸업과 동시에 곧바로 취직에 성공한 5는 서울이라는 낯선 도시에 살게 됐다. 다음으로 자취 팁을 공유하고 돈을 굴리는 투자에 대한 이야기가 잦아졌다. 마지막으로 책임감에 대해 더욱 깊게 고민하는 직업인으로서 어른이 되었다. 우리, 너무 순식간에 늙어버렸다. 허구한 날 여자 얘기로만 몇 시간을 죽이곤 했는데.


나는 입사 하루 전 날, 400여 일을 만난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급하게 회사 근처의 원룸을 구했고 어찌어찌 정착했다. 상실에 대한 찝찝함은 몸과 마음이 바빠 간신히 잊고 사는 듯 하지만 실은 여전하다. 반면 5는 꽤 오랫동안 진득한 연애를 해오지 못했고 여럿으로 겹친 가정사로 인해 상경에 홀가분함을 느끼는 듯했다. 그러한 차이가 서로에 대한 입장 차이를 만들었다. 우리에게는 커리어에 집중한다는 큰 틀의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것을 어떻게 쌓아 올릴지에 대한 견해가 달랐다.




5는 오롯이 본인만의 행복을 좇겠다는 강단을 표했다. 누구보다 고되게 살아온 그에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하지만 나는 향후 몇 년간은 내 인생이 없어도 좋다고 말했다. 부모의 곁을 떠나와보니 그 소중함을 느낀다는 진부한 상황에는 동감하지 못하지만 그러한 시늉 자체는 필요한 도리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당장에 우리 엄마만 봐도 그렇다. 유방암을 이겨낸지 채 3달이 지나지 않았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스미싱 사기를 당했다. 연수를 받다 동생에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얼른 돈을 벌어야겠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아직 그리 힘들지 않다. 벽간 소음에 큰 스트레스를 받는 것 말고는 예민한 나를 크게 괴롭히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얼른 베풀고 싶다. 내게는 챙겨야 할 형 동생들이 너무나 많고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내가 조금 참는 것에 그리 큰 불만을 갖진 않을 것이다. 30년 넘게 이렇게 살아왔다는 아빠가 있는데 내가 무얼 안다는 듯이 말하겠으며 힘들어봐야 얼마나 힘들겠는가. 노예근성이라고? 자본주의 사회에 노동자는 현대판 노예와 다름없다. 어떤 마인드 셋을 무장하느냐에 따라 버텨내는 강도가 다를 뿐.


5와 나는 강한 사람이다. 바다 출신인 우리는 민물고기 같은 서울 사람들에게 그다지 큰 공포감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바다 물고기들도 수질이 달라지면 잠시간의 적응 기간을 필요로 한다. 5에게는 지금이 그 순간인 듯하다. 5는 요즘 술만 마시면 운다.




"그러면 뭐해? 달라질 거 있어? 우리는 그냥 '다음 거' 하면 되는 거야"


내 입에서 이 따위 냉철한 말이 나오는 시기가 올 줄이야. 주로 내가 울고 그가 듣는 식이었는데 나는 괜히 그가 우는 상황이 무안해 나 답지 않은 충고를 건넸다. 5의 눈물은 그의 개인사 때문이었지만 그 속의 뼈는 앞으로의 인생을 관통하는 것이었다.


치킨을 남김없이 먹었다. 맥주도 다 마셨고 식자재 마트에서 사 온 대용량 소주는 조금 남았다. 술자리가 끝날 즈음에는 평소보다 많이 취했다. 5는 종이컵에 재를 털며 담배를 피웠고 마시지 않은 코카콜라를 챙겨가라고 했다. 주섬주섬 패딩을 챙겨 입는 나를 두고 5는 곧바로 잠에 들었고 코를 골았다. 많이 피곤했나 보다.


아직도 집처럼 느껴지지 않는 내 집으로 돌아가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다음 거, 다음 거, 다음 거. 지금의 나에게 '다음 거'는 대체 무엇일까? 성공적인 직장 생활? 안정적인 연봉? 써도 써도 아깝지 않은 베풂? 모르겠다. 지금의 내게는 평소 가장 소중한 가치라고 자부했던 사랑조차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정말 단어 그대로의 '다음' 것에 집중하고자 하는 포부만이 있을 뿐이다. 형체가 흐릿한 목표 때문일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기 힘들었고 한 시간을 더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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